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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산책]침묵은 금이 아니다 결코안성길 시인·평론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이는 ‘삼국유사’ 권2 신라 48대 경문왕조의 '여이설화(驢耳說話)' 속 복두쟁이의 외침이다.

경문왕은 임금 자리에 오른 뒤 갑자기 귀가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다. 그것을 오직 왕 전속 복두쟁이만 알았다. 그는 평생 그 사실을 감히 발설 못 하다가 죽을 때에 이르러 도림사라는 절의 대숲으로 들어가 대나무를 향하여 그 사실을 외쳤다. 이후 대숲 속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소리가 메아리쳤다. 후에 왕이 그 사실을 알고 대숲을 베고 산수유를 심게 했으나 소리는 여전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진실은 결국 힘으로 틀어막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여기서 필자가 정작 눈여겨본 건 복두쟁이의 고통이다. 그 고통의 원인은 불을 보듯 명약관화하다. 권력에 짓눌려 말을 할 수 없어서였다. 약자인 그에게 그런 고통의 결과나 궁극적인 해소는 죽음뿐이다. 사실 그는 이래저래 죽음에 내몰리는, 앞의 호랑이를 피해 뒤로 돌아서니 이리와 마주치는 전호후랑(前虎後狼)의 처지였다. 그러나 비록 죽더라도 고통의 사슬은 끊어주는, 소위 신원(伸寃)은 하고 가야 혼령이라도 평안에 들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의 굴레로서 일상을 얽어맨 그 고통의 근원을 말로 발설함으로써 끊어낸 것이다. 이처럼 말은 양날의 칼처럼 고통과 치유(治癒)를 한 몸에 지녔다. 그렇지만 말의 궁극적 기능은 드러내고 소통하는 치료의 과정을 거쳐 원래의 본모습으로 돌아가 회복되게 하는 치유이다.

이슬람 지역의 고전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에는 천 하루 동안 이야기를 이어간 이야기꾼 세헤라자데가 포악한 왕을 결국 설복시켜 그와의 행복한 결혼에 이른다. 그런데 복두쟁이의 외침과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말을 수단으로 하여 문제 상황을 해결한 점은 공통적이지만 동시에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것은 말의 주체와 객체 문제이다. 복두쟁이는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외쳤으니 결국 자기가 그 스스로에게 외친 것이고, 그 결과 고통의 굴레를 스스로 끊어버렸다. 반대로 세헤라자데는, 날마다 처녀와 혼례를 치른 후 다음 날 아침에 처형시키던 왕에게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해주어 왕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결국 죽음의 위기 또한 해결한다.

과거에 우리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무조건 죄악시하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치부했다. 말이 많으면 일단 자기 권위에의 도전으로 보았다. 그래서 말대꾸에는 시비를 떠나 응징부터 해서 기세를 꺾으려고만 들었다. 그 결과 다수의 한국인들은 질문을 잘 하지 않거나 못하게 되었고, 토론도 매끄럽게 이어가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우리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생각하는 사람)라는 학문용어에서 짐작되듯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한 기준이 된다. 즉 죽은 자는 결코 생각할 수 없고, 물론 말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따라서 살아있다는 것은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쓴다는 것이니, 역으로 말과 글을 구사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은 비록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자이다.

오늘날 컴퓨터와 핸드폰 등 전자기기의 폭발적인 성장은 인터넷과 SNS 등의 대중화를 몰고 와 바야흐로 말이 넘쳐나는 말의 성찬 사회가 되었다. 그런데도 일군의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의 억압구조 사회 시스템 하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지독히 가난했던 집안 사정 때문에 받아야 했던 고통과 상처를 수십 년 아니 평생을 여전히 안고 살고 있다.

사십여 년 전, 필자의 중학 시절 은사님 중에 '야구 할배'라 불리던 한문 선생님의 가르침이 문득 떠오른다. 선생님은 칠판에 '耳+口+王=?'이라 쓰시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눈을 맞추시며 뜻을 묻고는, 중구난방의 대답을 다 들으신 후에 '聖人'을 쓰시고는 "제 귀를 열어 남의 말을 가장 많이 듣고, 제 말은 가장 적게 하는 사람이 성인이다. 성인 되기 쉽제!"라고 하시며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되짚어 보니 성인은 말에 대한 절제력을 지닌 것이지 결코 안 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속담처럼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인 것이다.

얼마 전 전국 성인문해 학습자 백일장 공모가 있었다. 근무하는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시간을 가지는 와중에 학습자들이 글쓰기를 두려워한다는 건 예전에 알았는데, 새삼스레 깨달은 게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글쓰기는 남과의 소통일 때가 많고 그것이 중요하지만, 이제 인생의 후반에야 한글과 숫자를 겨우 익힌 우리 성인문해 학습자들에게 글쓰기는 자기와의 소통이라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떻게 어떻게 힘들게 글을 쓰면 그동안 그들이 살면서 남몰래 흘렸던 피눈물과 받았던 상처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들고, 그런 과정만으로도 많이 위로받고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진다는 걸 생생하게 목격한 것이다.

비록 맞춤법이 더러 틀리고, 쓸데없는 반복이 많이 보여도, 그 자신이 써놓은 글을 다시 읽고 보는 그 순간, 그것은 마법의 거울이 되어 그의 비밀스런 구석구석까지 도사린 고통의 응어리들을 물처럼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풀어낸다는 것을, 스스로가 스스로를 진실로 지지하고 위로하고 따뜻하게 격려하게 한다는 것을 재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글쓰기는 결국 그 영혼의 매운 때를 씻는 행위다. 나, 나아가 이웃, 저 넓고 거친 세상과 말 걸기다. 소통이요, 진정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침묵은 결단코 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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