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일 울산시의회 의원

조선왕조 오백년의 흥망성쇠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 충신(忠臣)과 간신(奸臣)의 중용여부에 갈렸다. 대표적 성군 반열에 오른 세종과 정조는 왕권을 확립하면서도 신권을 용인했다. 신권을 용인했다는 것은 언관(言官)과 사관(史官)이라는 비판기능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덕분에 충신은 넘쳤고, 간신은 설 땅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표상으로 회자되고 있는 황희는 세종시대의 명재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왕의 참모로서 오랜 기간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 황희는 옳은 일이라면 주저함이 없었고, 바른 길이라면 과감히 걸었다. 왕의 일방적인 독주에 제동을 거는 언행에도 거침이 없었다. 본인의 즉위를 반대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황희를 곁에 가까이 둔 것은 이 같은 충직함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황희 또한 자신을 내쳐도 할말이 없는 상황에서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준 세종을 존경했고 따랐다. 성군 세종과 충신 황희는 왕과 신하로서 최적의 조합이라는 역사의 평가를 받고 있다. 세종시대에는 황희뿐만 아니라 맹사성, 박팽년, 성삼문, 장영실, 김종서 등 숱한 충신을 낳았다.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시대였음에도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과 실력에 걸맞은 자리와 역할을 부여했고, 그들은 왕의 발탁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였다. 세종 못지않은 성군으로 칭송받는 정조도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탕평책으로 정국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조선시대 최고의 문화부흥기를 열었다. 집현전이 세종시대의 상징이라면, 정조시대는 규장각이었으며, 정조는 한걸음 더 나아가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등 신기술과 신문명 도입에 적극적이었으며, 신진인물을 수혈하고, 우수인재를 고루 등용함으로써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으려 애썼다.

채재공은 세종시대 황희에 버금가는 정조시대 최고의 충신으로 존경받고 있다. 채제공은 영조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위해를 가하려 할때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간청했다. 사도세자를 감싸는 것은 왕에 대한 반역으로 금기나 다름없었지만, 채제공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영조는 정조에게 '내겐 마음이 곧고 진실한 신하인 순신(純臣)이지만, 네겐 충신(忠臣)'이라는 말을 전하며 채제공을 중용토록 했다.

영의정에 제수된 채재공은 금난전권의 특권을 폐지하고,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 해결에 앞장서면서 정조의 개혁정치와 민본정치 구현의 지렛대 역할을 했다.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인사마저 고르게 기용해 숱한 충신을 배출한 세종과 정조와 달리, 연산군과 광해군은 충신은 철저히 배제하고, 간신을 중용함으로써 폭군으로 낙인찍혔다. 언관과 사관의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신권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왕권의 비대화에 골몰했기 때문이다. 왕권에 집착한 나머지 충신이 설 자리는 없었고, 간신만 득세했다.

간신이 우글거리는 자리에 성군이 있을 순 없었다. 왕은 자신에게 달콤한 말만 하는 간신을 지근에 두었고, 간신은 왕의 위세를 업고 호가호위했다. 왕과 간신 사이에 백성의 존재는 없었다. 민심이라는 백성의 파도는 왕이라는 배를 뒤집어엎었다. 왕의 눈과 귀를 멀게 한 것은 간신이었지만, 결국 간신을 중용한 것은 왕이었기 때문에 보다 큰 책임은 간신보다는 왕에게 있다. 과거를 지금의 시대로 치환해보면, 왕의 위치는 크게는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 작게는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기초단체장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감시와 견제, 비판기능을 무용지물로 전락시켜 브레이크없는 권력이 되지 말고,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 구별하여 인재를 중용해야 할 것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양약고구 충언역이(良藥苦口 忠言逆耳)'라는 고사성어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역사는 돌고 또 돈다. 반복되는 역사의 엄중함과 교훈을 깨닫지 못한다면 올바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민선 7기 1년을 보낸 지도자들은 다시금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드리는 충언(忠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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