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연 수필가

비바람이 몰아친다. 비닐하우스로 비가 들이치자 실내가 금방 눅눅해진다. 건너편 산은 비가 뒤덮은 지 오래고, 자욱한 안개로 높은 산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산속의 나무와 풀들이 비바람에 하나가 된다.

느슨한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방울이 더 굵어지니 낭패다. 농로가 흙길이라 집으로 돌아갈 일이 막막하다. 비에 젖은 앞산과 마주 앉았다. 내게 비 오는 날의 막막함은 낯선 일이 아니다. 소낙비가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학교에서 무작정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 어느 날처럼…

비닐우산마저 귀했다. 우리들은 대부분 수업을 마칠 즈음 비가 내려도 우산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맞고 뛰었던 것 같다. 시골 벽촌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아주 가끔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어머니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당신은 비를 맞고 비닐우산을 고이 접어서는 학교 앞까지 마중 나온 날도 있었다. 비옷은커녕 얇은 나일론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가슴까지 고스란히 들어났다. 창피한 것도 잠시 우산은 내게 주고 어머니는 비를 맞으며 집까지 나란히 걸었다. 작은 우산으로 굵은 비를 가리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장시간 비를 맞고 나면 몸의 기온이 떨어져 가벼운 감기를 얻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은 어머니도 하던 일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젖은 옷에 똬리를 인 머리에는 항상 큰 함지박을 이고 있었다. 함지박 바닥에 흥건한 빗물을 받아 오기도 했다. 어머니가 집에 오면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이다. 아궁이 앞에 앉아서 몸을 데우는 당신의 젖은 옷에서 흙냄새가 났다. 나는 코를 가까이 대기도 했다. 당신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빗물이 섞인 살 냄새가 좋았다. 땀과 흙냄새도 거기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냄새는 더 진했다.

어린 날들에는 유난히 비가 오는 날이 좋았다. 그나마 가끔씩은 어머니가 일을 쉬는 날은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밖에서 일을 하다가도 비가 오면 물에 빠진 생쥐처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밥을 먹고 잠드는 시간 말고 내가 당신과 살을 부비고 얼굴을 마주 보며 같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비 오는 날이었다. 당신의 몸에서 품어져 나오는 온기가 내게 전해지면서 코끝을 스치는 것이 좋았다. 잠을 자다가도 습관처럼 어머니의 가슴을 만지며 품속으로 파고들 때의 편안함 같았다.

빗발이 굵은 것이 쉽게 멈출 것 같지 않다. 간이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모닥불을 피우고 젖은 옷을 말렸다. 어머니에게서 나던 냄새는 아니다. 사람은 그런 것 같다. 가질 수 없어서 더 귀한 것이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없어서 더 그리운 것이 많다.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지 싶다. 나이를 절대 먹지 않을 것 같던 어머니는 총기도 잃어간다. 딸 바라기만 하면서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저리다. 비 오는 날은 저린 마음을 숨기기 안성맞춤이다. 때때로 빗물이 눈물이 되기도 하지만 누가 알게 뭐람 마음이 가는 대로 할 참이다.

나이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일상으로 즐기며 누리고 살아온 것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애처롭기보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연민이다. 어머니는 당당하고 바지런했다. 그러나 그런 바지런함이나 총기도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잃어가는 것이 많을수록 남은 것은 자식에 대한 무한한 짝사랑이다. 그 애절한 짝사랑을 바라보는 것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차디찬 수액처럼 아리다.

빗속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어머니가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비닐우산을 들고 걸어올 것 같다. 금방이라도 불쑥 '아가' 하며 몸매가 요염하게 드러나는 실루엣 차림으로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지 싶다. 꿈같은 시간이 잠깐 스치고 나는 다시 잦아드는 비를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비가 오는 날에는 내 유년의 추억도 자유로이 드나든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지는 듯하다. 비를 느끼는 날은 마음에 빗장 하나 풀어내는 시간이다. 촉촉한 습기를 들여놓는 잠깐의 휴식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