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경북예술마당 솔 대표·전 포항 대동중 교사

▲ 김현식 경북예술마당 솔 대표·전 포항 대동중 교사.
사람은 두 귀로 소리를 듣고 한 입으로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부른다. 듣지 못하면 말하지 못한다. 태교가 중요하다고 해서 태중 아기에게 대부분 모차르트를 들려준다. 우리 음악을 태교 음악으로 들려주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어릴 적 귀로 듣는 소리가 평생 음악성을 좌우하기도 한다. 기억하지 못한 수많은 소리들에 내 귓전에서 부서졌으리라.

필자는 김천 평화동에서 태어났지만 곧 어모면 아천국민학교 앞에서 1962년까지 살았다. 그 시절 풍경이나 소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1962년부터 1966년 2월까지는 직지사 입구 못내마을에서 유년을 보냈다. 최초로 기억하는 공간이다. 독실한 개신교도인 어머니를 따라 주일이면 십리 길을 걸어 직지교회로 갔다. 지겨운 목사님 설교, 찬송가 부르는 소리를 기억한다. 개신교회 음악은 미국을 통해 들어온 양악이다. 직지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할머니들은 양악이 익숙하지 않아 이상한 소리를 낸다. 음정도 그렇지만 박자도 실제 악보완 다르게 불렀다. 대부분 곡조를 6/8박으로 불렀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 형식으로 바꾸었다. 할머니들이 보는 찬송가는 콩나물대가리 없이 그냥 가사만 큼직하게 써진 것이다.

1966년 모암동으로 이사했다. 제법 동네가 크고 신작로가 있어 내 귀에 들리는 소리도 다양했다. 길가엔 스피커를 설치해 라디오 방송을 틀어놓았다. 5분 드라마 '김삿갓 북한방랑기'를 지겹게 들었다. 왜색풍이 짙은 대중가요도 가끔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었다.

어느 땐지 확실하지 않으나 멀리서 징소리를 들었다. 김천에서 유명한 '농악'이 스치듯 귓전에 맴돌았다. 2014년에 유네스코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우리 농악을 등재했다. 김천 빗내농악도 그 중에 포함된다. 어모와 빗내마을이 있는 개령은 서로 붙어 있고 거리도 가깝다. 내가 들었던 징소리는 빗내 농악 열두 마당 중 한가락 소리였는지 모른다.

70년대 대구로 생활 터전이 바뀌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웃에서 굿을 하면 밤새 굿소리를 듣게 되어도 서로 이해를 해주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굿소리가 처음엔 시끄럽지만 어느 순간 묘하게 빠져들고 그 와중에도 잠에 든다.

1978년 서울에서 탈춤을 배웠다. 우리 가락에 맞추어 몸짓하는 게 무척 힘이 들었다. 세오녀는 우리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덕분에 나도 우리 민요나 판소리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의식적으로 접근했지만, 세오녀에게 우리 음악은 선험적이다. 남해섬 진목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들어온 우리 음악이기 때문이다. 장인께서는 그 시절 귀한 판소리 음반을 사오셨고, 세오녀는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한국 무용을 배웠다. 부부 싸움 뒤에 나는 서양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데, 세오녀는 판소리 들으며 진정시킨다.

1990년대 초반 포항으로 내려와 한터울에서 권오현 선배에게서 사물놀이를 배웠다. 운동권 활동가가 어느 순간 우리 음악 전수자로 변했다. 1994년부터 문화유산답사동호회 '우리얼' 활동하면서 우리 음악에 더욱관심을 가졌다. 우리얼 여름 캠프 프로그램엔 '우리 음악 배우기'가 꼭 들어갔다. 동호회 안에 풍물패도 조직되었다. 동호회원 인창 님은 민요와 판소리에 깊이 빠졌다. 목풀기 위해 판소리 흥보가 중에서 '놀부 심술 대목'을 배우던 기억이 난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이명희 명창도 이 시기에 인창님을 통해 만났다. 오봉 역시 우리 음악에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봉이 만난 선생님은 정옥향 명창이었다. 덕분에 나도 강원도 양양 '정옥향판소리연구소'도 찾았고, 사단법인 국악로문화보존회 이사로도 잠시 몸담았다. 최근엔 경남 하동군판소리체험관 관장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례에 계신 김소현 명창과는 하동 악양 폐교된 매계초등학교에 문을 연 '청학문화체험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다. 김소현 명창은 전남 구례 '섬진강판소리학교' 교장으로 계시면서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최근엔 '운조루 문화마당'을 통해 일반인에게 동편소리를 들려준다. 김소현 명창은 아내인 박정선 명창, 따님인 김새아까지 모두 판소리 가족이다.

소리꾼 최용석은 바닥소리 대표 시절 '쥐왕의 몰락기' 공연으로 포항과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예술로는 먹고살기 힘든지 요즘 '판소리하는 바리스타'로 서울 당산동에 커피점을 냈다.

학교에서도 우리 음악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가르칠 사람이 없다. 우리 음악인들이 중고등학교 교사로 거의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디오 방송에서도 천대받고 있다. 우리 음악을 듣는 사람이 적다. 악순환이다. 사라져 가는 우리 소리, 양악에 제 자리를 빼앗긴 우리 음악을 되살릴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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