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햇고구마 한 상자가 늦더위를 헤치고 도착했다. 자지러질 듯한 매미소리와 용광로 더위에 싸워 이겼노라 외치는 개선장군 모습이다. 어느 서해 바닷가 황토밭의 단내를 죄다 담고 왔는지, 털썩 현관 앞에 내던져진 박스에서 단내가 난다. 파도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살아온 이런 저런 이야기는 맛으로 얘기 하겠다는 듯, 침묵으로 몸 풀기를 기다리는 저 상자속의 결실들. 여름이 키우고 가을이 거둔 소확행이다.
시원해진 바람을 앞세운 가을 등쌀에 여름이 주춤거린다. 무성하던 초록빛이 누그러지는 어느 날. ‘가을 아침을 보냅니다.’ 라는 사내의 문자를 받았다. 고구마로 아침을 때운다는 내 말을 용케 기억해 냈던 모양이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땐 입술을 꼭 깨물고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다. 그의 맑고 융숭한 마음을 내 짧고 무딘 입술의 단어로 더럽힐 수는 없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사람냄새, 가을 냄새를 담고 득달같이 달려온 귀한 선물이다.
며칠 전 사내가 캤다는 고구마는 실했다. 그러나 속성 재배되어 덩치만 키웠을 뿐, 아직 꽉 찬 영글음은 아니다. 일찍 태어난 동생 때문에 강제로 젖을 뗀 아이의 젖 바라기 하는 여린 모습이다. 그러나 달콤한 풋풋함이다.
그런데 이 가을 다리목에서, 여름은 억울하다. 보란 듯이 잘 키워 칭찬 한번 받아보려 보냈더니, 어느새 먼저 도착한 가을이 내 것이라 생색내고 있다. 여름은 식물이 원하는 무한의 온도와 햇빛, 충분한 물을 공급하며 뭇 생명에 살을 붙였다. 튼실한 잎과 줄기를 만들어 열매를 달고 무게를 늘였다. 그러나 처서가 지났으니 내 것이라 우기는 가을에 분통이 터진다. 누구라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랴. 갈 때가 되면 가리라 했다. 그저 성장하는 것들이 하 예뻐 좀 더 지켜보려 했을 뿐인데, 개념 없는 여름이라고 재촉하는 가을이 얄밉기만 하다. 빨리 빨리만 외치며 계절 감각조차 무디어지는 사람들의 속성근성도 못마땅하다. 기껏 백년도 살지 못하면서 마구마구 시간을 당겨쓰려는 인간들에게 실망 또한 적잖다.
일생을 황토밭에서 뒹굴다 온 탓일까, 황토 팩한 표면이 차르르 윤기 가득하다. 소녀의 수분 가득한 해맑은 얼굴이다. 살짝 닿았을 뿐인데 흠집이 생기자 붉은 껍질 속에 갇혔던 노란 속살이 싱그럽다. 영양 가득 싱싱한 속살이다. 그러나 지난한 황토밭의 굴곡진 삶이었나. 대부분 구부러지고 뒤틀린 모양이다. 탄력 진 피부에 일그러진 주름투성이다. 속도가 곧 진리인 세상에 속성으로 자라느라 몸부림 친 흔적일까. 아니면 한 모금의 물, 한 줌 햇빛 쫓느라 일그러진 제 모습 들여다볼 여유조자 없었던 것일까. 문득 자신만의 속도로 살고 싶다며 홀연히 도시를 떠나던 한 사내를 생각한다.
속도가 경쟁인 세상에 낙오 된 한 사내가 있었다. 직장 일에 대처하는 법도, 경쟁에도 늘 한 발 늦었다. 그래서 언제나 누군가의 뒤에 있었다. 그렇지만 사내는 속도의 이면을 알고 있었다. 바쁘게 산만큼 인생도 바쁘게 지나간다는 것을, 많은 일을 한 것 같지만 결국엔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한 발 앞선 이들이 알찬 인생을 살고 있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속성 재배된 인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그래서 그는 도시를 떠났다.
노트북 하나 들고 방황하던 그가 정착한 곳이 바로 서해 바닷가였다. 한껏 낮아진 자존감을 추스르며 자신만의 속도로 살고자 한다며 안부를 전해왔다. 하늘도 보고, 바닷물도 보고, 황토밭에 자라는 잡초와 눈도 맞추며 느리게 산다고 했다. 때로는 태풍을 기다린다고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메일에 담겨 오는 사내의 글은 안정된 행복감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부러워 나도 모르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로 답장을 하곤 했다.
계절은 하루아침에 변해버렸다. 하늘이 깊어지고 노을이 짙어지는 시절이 왔다. 결실을 가까이 하니 뭔가 조금은 안심도 된다. 여름이 떠난 자리, 여기저기에 매미가 나무에 허물을 남겼다. 여름 내내 그리도 힘차게 울어대더니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아무도 떠날 때를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몸이 반응했을 터이고 매미는 저렇듯 자취를 감추었으리라. 떠나간 자리가 스산하다. 이제 곧,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그 자리에 내릴 것이다.
바람의 점성(粘性)도 나날이 다르다. 사위는 조용하고 머리는 명징하다. 한 치 더 높아진 하늘엔 하얀 구름이 그득하다. 아름다운 곡선의 순도 높은 우유 빛이다. 어느 때 부터인가. 계절은 사색하기도 전에 화급하게 하룻밤 사이에 가고 왔다. 아직 늦더위가 저만치에서 서성대지만 곧 환절기의 뼈마디가 욱신거리리라. 처서가 지나자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누구려졌다. 밤새 몰아치던 비바람이 용광로 같은 열기를 몰아냈나보다. 기가 죽은 모양새다. 아직 떠나지 못한 수매미의 쇠잔해진 울음소리가 오늘따라 처연하게 들린다. 나만의 속도로 맞이하는 가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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