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열 사회2부 부장

한국인의 성향을 드러내는 말 중에 '못 먹어도 고(go)'가 있다. 정(情)에 약한 민족답게 ‘기분파’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려됨을 알면서도 괜찮은 것으로 일단 우기고 끝을 보자는 심사다. 세밀히 따져볼 때 이것은 합리성을 상실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이와 유사한 것이 국제 관계 속의 ‘한일 관계’이다. 아시안컵이든 월드컵이든 일본과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에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지는 날엔 감독을 비롯한 모든 선수가 역적이 되고 귀국길에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최근 일본과의 무역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러한 양상이 계속되고 있음을 느낀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로서는 원자재와 부품을 수입해 완제품을 만들고, 이를 수출해 이익을 얻는 구조이기에 국제관계와 외교력의 중요성은 국가 존립에 절대 필요 요소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가운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일본 관광 금지 등 반일감정 고조 행위들은 중요한 국익보다 국민의 자존심을 앞세운 처사일 뿐이다.

기술 개발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모든 부품에 대한 자급자족(自給自足)식 공급은 글로벌 기업에게 있어 족쇄가 아닐 수 없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기업들은 정치로 인해 비상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미중무역 전쟁으로 전전긍긍하던 기업들이 설상가상(雪上加霜) ‘한번도 가보지 않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처지가 됐다.

기술과 실력, 국력으로 일본을 능가하는 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해야지, 적대시하고 외교 단절을 이룬다고 극일(克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를 만들고 싶다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처럼 비굴함과 모욕을 참고 힘과 실력을 키우는 일에 최선을 해야 한다.

체면과 자존심 등을 논한다면 극일은 결국 허망한 꿈에 불과할 것이다. 국가지도자가 반일을 선동하고 국민이 죽창을 든 의병의 기개를 가지고 죽창가 부르기를 희망한다면 100년 전 과거 속에 살고 있는 구시대 인물임에 틀림없다.

백제와 고구려 패망으로 당나라에 잡혀간 수백만의 우리 백성과 부녀자들의 한(恨)은 왜 기억해 주지 않는 것인가. 이후 고려시대 조공으로 중국에 끌려간 이 땅의 수많은 딸들의 원성은 왜 외면하는가?

청나라에 패전함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의 백성의 원한과 청을 탈출, 고국에 돌아온 딸들에게 환향녀(還鄕女)라 부르며 돌을 던졌던 선조들의 죄는 어찌할 것인가. 국력이 약해 이 땅의 딸들을 지켜주지 못했음에도 겁탈당한 딸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어른들의 양심은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이러듯 오랜 역사 동안 이 땅의 딸들을 겁탈하고 유린한 중국에 대해선 왜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일본처럼 과거사를 들추려면 중국 문제도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국력이 약해 이 땅이 유린됐고 죄 없는 딸들이 수치를 당했으며, 못난 어른들의 분풀이로 상처받은 어린 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나의 조상 중에 친일파가 있거나 일본을 감싸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반일 감정에 매여 국익을 해치는 이들이 “극일을 위해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며 일본 유학길에 오른 선진들의 깊은 뜻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국력을 길러야 한다.

와신상담의 유래를 말하지 않더라도 국가 지도자라면 국민이 취할 태도를 올바르고 분명하게 제시해줘야 한다. ‘감정과 자존심이 먼저가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지도자가 먼저 와신과 상담의 고통을 감내하며 국민이 따르기를 기대하고 격려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 이 민족에게 죽창을 들고 반일 선동에 뒤따르라고 해서는 살길은 없다. 조총을 든 일본군 앞에서 부적을 가슴에 품고 죽창들고 달려나간 동학군이 전원 몰사하지 않았던가. ‘못 먹어도 고’는 국가지도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현실과 국제사회를 냉정히 살피고 검토해 국민이 올바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이가 참된 국가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이며, 국민은 그를 존경하고 따를 것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국민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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