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마오쩌둥의 ‘신중국’과 중국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간체’와 ‘번체’다.
우리는 중국에 처음 도착하면서부터 우리가 알던 한자가 아닌 해독할 수 없는 문자에 당황함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웬만한 한자(漢字)는 다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신중국의 문자인 ‘간체’앞에서는 지체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는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신중국’은 우리가 알던 중국과는 크게 다르다는 인식에 두려움까지 들게 된다.
공항은 ‘空港’이 아니라 ‘지창’(机场) 고향은 ‘故鄕’이 아니라 '故乡‘으로 표기되고 학습은 學習대신 学习로 표기된다. 같은 한자문화권이라고 여겨 온 중국이 낯설어지게 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한자를 제쳐두고 ’간체’라는 새로운 중국의 문자를 공부해야 한다는 중압감도 들게 된다.

‘간체’(簡體)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직후부터 제정논의가 시작되기 시작했고 1956년 중국문자개혁위원회가 공포하고 이후 국무원 전체회의에서 통과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간체 공용화는 63년이 지났다. 신중국의 간체자 제정 이전에도 중국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수백여 한자가 약자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1850~1864)때는 간체가 처음으로 합법적 지위를 얻기도 했다. 그 이후 국민당 정부(중화민국)가 간체화방안을 법제화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역사도 있다. ‘한자의 간소화’는 중국의 오랜 숙원이었던 셈이다.
한자의 혁신과 세계문자화는 마오쩌둥 주석의 오랜 숙원이었다고 한다. 마오 주석은 “한자는 세계의 문자와 통하는 병음문자로 개혁돼야 한다.”며 한자를 간소화하는 ‘문자혁명‘을 지시했다. 간체화 제정에 이은 한자의 표음문자화가 마오 주석의 최종적인 목표였다. 인민대중이 모두 이해하는 간편한 문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마오의 생각이었다. 간체화 제정 당시 중국의 문화계에서는 “전통과 단절될 수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1956년 공포된 간체자는 이후 몇 차례 보완작업을 거쳐 1964년 총 2,200자로 확대되었고 1984년에는 3,000여자로까지 늘어났다.
사실 간체자 제정이후 중국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간체자 제정을 ‘문자의 추수혁명(秋收革命)’이라고 부른다. 마오 주석이 1927년 후난성에서 일으킨 ‘추수혁명’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의미다.
특히 간체자는 중국의 문맹율을 낮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중국의 오랜 전통과 단절되는 등 문화적 퇴보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함께 받고 있다. 간체제정 당시 중국의 문맹율은 80%를 웃돌았다. 간체자가 공용화된지 30년이 지난 1980년대 중국의 문맹율은 23%로 급락했고 지금은 10% 내외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에서 ‘영원한 총리’로 추앙받고 있는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지식분자는 아동이나 문맹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며 간체화가 문맹율 해소가 최대의 목적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간체 공용화가 60여년이 지나면서 간체는 중화권의 주류문자가 되었다.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권에서 한자는 간체와 번체를 함께 교육하지만 대다수는 간체를 채택하는 등 간체는 중국어의 국제표준문자로 인정받았다. 중화문화권에 편입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도 간체를 자국의 공용어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대만과 우리나라에서는 간체 대신 ‘번체’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간체공용화’의 가장 큰 단점은 간체만 이해하는 중국인들이 중국의 고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자 중국내에서도 간체와 함께 번체도 교육해야 한다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힘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유엔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중국어표기를 간체와 번체를 병용해오다가 최근 ‘간체’로 중국어표기를 단일화했다.
신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번체와 동시에 간체 교육을 병행하는 살아있는 한자교육에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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