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중국은 중국공산당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사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중국공산당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개혁개방이후 ‘빛의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한 중국은 정치에 대한 인민의 참여를 최소화하면서 통치체제의 핵심인 공산당에 대한 인민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마오쩌둥 주석의 어록에서 따 온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为人民服务)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중국공산당이 주도하는 국가지도체제를 합리화시키고 있는 중국. 앤디 워홀의 ‘마오쩌둥의 초상화’ 외에는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 내걸린 마오의 초상화는 요지부동의 위상을 갖고 있는 마오의 중국. 당이 곧 정부이자 국가인 사회, 신중국 성립이후 마오를 비롯한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신중국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신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중국공산당 주석, 국가주석 1949-1976)의 임기는 사실상 종신이었다. 건국 후 최고지도자가 된 마오는 ‘대약진운동’과 ‘대기근’사태로 수천만 명의 인민을 굶어죽게 하는 등의 아사 등 잇따른 정책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몰려 국가주석을 자신의 혁명동지이자 동향(후난성)의 류샤오치(刘少奇)에게 물려줬다. 그러나 류샤오치의 개혁정책이 빛을 발하고 자신의 지도력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홍위병의 준동’을 통해 ‘문화대혁명’을 발동, 류샤오치를 끌어내렸다. ‘하늘 아래 두 주석이 공존할 수는 없었다.’ 당시 류샤오치는 국가주석, 자신은 중국공산당 주석을 맡고 있었지만 당의 영도는 넘겨주지 않았고 결국 국가주석직까지 다시 탈환했다.

문혁으로 권력을 재장악한 마오는 사망할 때까지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마오 사후 권력의 향배는 혼란을 겪었다. 마오의 4번째 부인인 장칭(江靑)은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등을 규합, 소위 ‘4인방’세력으로 마오의 후계승계를 획책했으나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사전 체포로 실패로 돌아가고 마오의 측근이었던 화궈펑(華國鋒)이 중국공산당 중앙위 주석으로 취임, 과도기의 최고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의 최고실세는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덩은 이후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하는 등 ‘오늘의 신중국’을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마오 주석의 불행한 전례를 따르지 않겠다며 당 주석이나 총서기, 국가주석 등의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 않았다.

덩샤오핑을 대신해서 전면에 나서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한 지도자가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였다. 제 11,12대 중국공산당 중앙위 총서기를 맡은, 후 총서기는 덩샤오핑을 비롯한 혁명 원로들의 이선후퇴를 추진하다가 1987년 덩에 의해 실각했고, 1989년 4월 15일 인민해방군병원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를 추모하는 시위가 톈안먼광장에서 시작되면서 ‘1989년 톈안먼사태’가 촉발되었다.

후야오방의 뒤를 이어 자오쯔양(趙紫陽)이 총서기직을 물려받았으니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며 실각했고 상하이서기로 있던 장쩌민(江澤民)이 덩샤오핑에 의해 총서기에 발탁, ‘톈안먼사태’를 강경진압하면서 사실상 20년간의 장쩌민시대를 열었다.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자인 중국공산당 총서기 1회 연임을 통한 10년 시대라는 전통을 세운 장쩌민은 후계자로 후진타오를 내세운 뒤 사실상 후 총서기의 막후 실세로 군림해왔다. 특히 장쩌민은 총서기와 주석직을 후 전 총서기에게 넘겨주고서도 한동안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넘겨주지 않으면서 막후실세라는 점을 전세계에 공공연하게 알리기도 했다. 후진타오 체제 10년이후 권력구도는 시진핑과 리커창이라는 두 상무위원간의 구도로 짜여졌지만 결국 후 체제하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장쩌민의 후원은 시진핑(習近平) 체제로 귀결되었다. 장쩌민이 상하이시 서기 시절 구축한 인맥은 이후 베이징에서 ‘상하이방’이라는 파벌을 형성했고 후 전 서기의 ‘공청단파’(공산주의 청년단)와 시 총서기의 ‘태자당’(혁명원로들의 자제) 등과 더불어 3대 막강한 이너써클을 구축했다.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는 1회 연임을 통한 10년체제가 관행이었지만 시 총서기가 아직까지 후계구도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집권이라는 새로운 권력구도의 길을 열어둔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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