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뒤 베란다 문을 열면 곧게 뻗은 폭 좁은 북향의 길을 만난다. 누군가에겐 사람냄새 눅진한 친근한 길, 누군가에겐 좁고 으슥한 길에 발걸음을 재촉케 하는 길이다. 초록에서 갈색으로 변해 가는 야트막한 산 밑까지 이어진 그 길을 따라 시선이 닿는 곳에 한 점 정물화처럼 앉아있는 한 사람을 만난다. 누군가 쓰다버린 전봇대 밑의 낡은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 해바라기 하는 듯한 희미한 실루엣. 잡은 지팡이 보다 더 낮은 자세로 앉았다 사라지는 그 하얀 그림자를 찾아 나선다.
오늘도 은나의 하굣길 발걸음이 바쁘다. 느긋하게 문방구를 기웃거리거나, 먹거리집 앞에서 여유로운 여느 초등학교 삼학년 아이들과는 달리 마음부터 조급해진다.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교문 앞, 서쪽 문방구를 돌아가면 작은 느티나무 아래 김이 폴폴 나는 어묵과 떡볶이를 파는 은나 어머니의 수레가 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일까. 빼곡하게 사람들에 둘러싸인 수레가 후끈하다. 길거리로 수레를 끌고 나선지 얼마 되지 않는 어머니가 쩔쩔매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어머니는 다친 허리에 큼직한 보호대를 두른 뒤, 서너 알의 진통제를 챙겨서 나왔다. 가끔씩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고사될 것만 같은 나무 같아서 은나는 겁이 난다. 그러나 정작 은나 어머니가 두려운 것은 허리통증이 아니다. 사실상 여자만 4대가 사는 가장의 나태해지려는 녹슨 삶이다.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아빠 없이 자라는 은나를 위해 하루하루를 보람차도록 애쓰며, 영혼을 맑게 보듬으려 진땀을 흘리는 중이다. 잔심부름에 고사리 손을 보태느라 송글송글 은나의 얼굴에 땀이 배일 때 쯤, 어머니와 떡볶이 한 접시를 놓고 마주 앉는다.
“할머니 기다리신다. 어서 먹고 가거라.”
오 분 거리의 할머니네 가게로 달음박질 해 가는 은나의 짧은 다리가 굴렁쇠 구르듯 한다. 할머니는 오늘도 은나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도시락을 챙겨 재봉틀 앞에 앉았다. 슈퍼에 딸린 창고 한 귀퉁이에서 수선을 하는 할머니.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먼지와 함께 옷을 고치고 있다. 은나의 하교를 누구보다 반기는 사람이다. 두어 번 수술한 할머니의 양 쪽 다리에 심상치 않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지도 벌써 서너 달. 선뜻 다시 병원을 찾지 못하는 것은 많은 돈이 드는 수술을 권유받았기 때문이다. 사업실패로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을 반 지하로 내 몰고 떠난 아들. 그 아들이 남긴 경제적인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죽어가는 나무도 누운 채로 혹은 선 채로 숲에 그대로 둔다. 이유는 이 나무도 수많은 다른 숲속의 생명들에겐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서식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은나 할머니의 수선집도 그랬다. 평생 해온 그 일은 할머니가 가장 잘하는 일이고, 몸의 상처를 돌보 듯, 상처 난 옷, 크고 작은 옷을 꿰매고 매만져 온전히 몸에 맞춰 주는 중요한 의미의 공간일 뿐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마저 여며주는 곳이다. 비록 좁고 어두운 곳이지만 가장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일상에서 사람다움에 늘 성실하려는 사람냄새 나는 곳이다. 외로운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으로, 누군가의 한숨과 눈물의 장소로. 위로와 격려의 공간으로 사랑받기 때문이다.
발그레진 얼굴로 찾아준 손녀를 할머니는 덥석 끌어안고 볼부터 비빈다. 두 평 남짓한 가게에 볕이 드는 시간이다. 그늘 속에서 피는 밝고 아름다운 꽃인 것을. 어찌 예쁘고 귀하지 않을까. 은나는 할머니가 도시락을 다 비웠는지, 챙겨 온 약은 드셨는지 매의 눈으로 꼼꼼히 살핀 뒤, 할머니 곁에 껌 딱지처럼 붙어 재잘거린다.
“노 할머니 추울라 어여 가거라.” 은나가 집으로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은 노 할머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만 보이는 반 지하 단칸방에서 은나를 기다리기 위해 골목으로 나와 해바라기 하는 노 할머니. 시장통 포목점에서 평생을 살아온 은나의 증조할머니다. 일생, 세상일에 한탄하지 않고 참회를 거울삼아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하며 부처님께 기댄 삶을 산 삶이었다. 백발에 꼬부라진 허리로 골목 저 끝을 향해 나풀거리며 날아올 한 마리 나비를 기다리는 유일한 외출 시간. 흐릿한 시선의 기다림의 끝에는 가을 햇살 같은 존재인 은나가 있다.
여기, 그늘진 곳에서 서로 그늘이 되어주며 부처님 미소를 닮아가는 이들이 있다. 낮은 곳의 그늘이 더 짙다. 더 습하고 공기조차 한 층 더 내려앉아 있어 무겁다. 그러나 오순도순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 그들의 특징은 바로 서로의 따뜻한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모락모락 따순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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