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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3> 조선 선조대 명신 문절공(文節)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서김상조 문화관광해설사
   
▲ 미암 유희춘이 강학을 위해 지은 연계정, 복원된 모습이다.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대나무로 유명한 고장 담양IC를 빠져나오면 창평슬로시티 입간판이 나온다. 창평면사무소를 지나 대덕면소재지로 가다보면 왼편에 미암박물관 표지판이 있다. 좌회전해서 조금만 가면 장산리에 닿는다.

조선 선조대 명신 문절공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선생의 종가 마을이다. 덕봉산 미암 선생의 종택을 가운데 두고 모현관, 미암박물관, 연계정이 빙 둘러 자리해 있다. 미암박물관은 마을입구 오른쪽에 ㄷ 자형 세 채의 한옥 건물이다. 조선 중기 대학자인 미암의 학문과 절의 경륜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5년 개관했다. 미암을 알지 못했던 이들 누구나 전시자료를 보면 압도당하게 된다.

보물 260호 미암일기와 목판, 문집과 일기, 서간 등 다양한 문적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선조가 하사한 관복과 신발, 타고 다녔다는 초헌은 실물 그대로 전시돼 있다. 부인 홍주 송씨 덕봉도 남편 못잖은 재원으로 시를 잘 지었다. 송덕봉의 시문과 가계도가 벽면 한 쪽을 차지하고 있다. 여류 문장가의 면모가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못지않아 보인다.

미암은 1513년(중종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호는 해남읍을 둘러싼 금강산 눈썹바위에서 유래된다.

어려서는 아버지 유계린(柳桂鄰)에게 배웠지만 장성해서는 신재 최산두와 모재 김안국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 때 하서 김인후와 동문수학의 연을 맺는다. 스물여섯에 문과 급제 뒤 검열, 홍문관 수찬, 무장현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547년 을사사화에 연루돼 제주도를 거쳐 머나먼 함경도 종성에서 19년간의 혹독한 유배생활을 견뎌야 했다. 다행히 선조가 등극하면서 해배됐다.

그 후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 관찰사, 대사헌, 예문관 제학, 3사와 형조 예조 공조 이조 참판 등 청요직을 거치며 선조를 성심으로 보필했다. 이 기간 당대 최고 기록문이 탄생한다. 바로 선조즉위년인 1567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까지 약 11년간 쓴 미암일기다. 14책에 이르지만 현재 3책이 유실되고 11책만 전해진다. 미암일기는 임란이후 국가 전적이 소실되자 선조실록 편찬에 채택될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일기가 아니었다면 선조대의 행적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하며 국사와 관안의 행정 낱낱을 그만큼 일일이 기록한것이다. 일기는 특성상 자신과 관련된 불미스런 사건은 미화 또는 삭제하게 된다. 그러나 미암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조선조 각종 사화에서 가택수색으로 화를 입은 선비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해가되는 일기는 남길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미암일기에는 이런 내용도 양심상 거리낄게 없다는 듯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론 자기 신변 대소사와 견문도 매일 빠짐없이 기록했다. 친필본은 해남 백명헌 집안에 소장돼 오다 이후 후손들의 노력으로 종가에 되돌아 왔다. 미암일기는 조선중기 사회사 연구학자들에게 당대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만큼 소중한 사료로 각인돼 있다.

미암일기는 광복 후 국보 401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군사정권 초기인 1963년 보물로 격이 떨어졌다. 아쉬움이 많지만 호남 출신 역사 인물에 대한 역차별이 아닌가 여겨진다. 궁금하지만 확실한 연유는 알 수 없다. 미암은 틈틈이 ‘육서부주’ ‘국조유선록’ ‘헌근록’ 등을 썼다. 시간날 적마다 학문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미암은 1569년 의술이 뛰어난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했다. 종가에 동의보감 내경편과 잡병편 이판본 5책이 전해진다. 미암은 1577년 여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선조의 소명을 받고 병든 몸을 이끌고 궁궐에 당도했지만 뵙지 못한 채 쓰러진 것이다. 부인 홍주 송씨 덕봉도 이듬해 뒤를 따랐다. 미암의 문적과 유물이 종가에서 보존 관리된 점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유림들이 업적을 기려 후세에 지은 고문서들도 거의 다 보관돼 있다.

호남출신 미암은 지금까지 영남지방에는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생전 저술 대부분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유실된 때문이다. 그러나 남은 문적과 유물로만 봐도 행적은 퇴계 이황과 견줄 대학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생전 퇴계 이황과 단 한 차례 만났고 교류는 없었다. 그러나 미암일기에는 자주 논쟁했다는 기록이 있다. 퇴계와 사단칠정론으로 논쟁한 고봉 기대승을 문하에 둔 사리만 봐도 대학자적 풍모가 느껴진다. 율곡 이이도 젊은 시절 미암이 부제학 시절 홍문관에서 ‘교리’로 근무했다. 율곡이 선조에게 ‘만언소’를 올려 미암의 칭찬을 받은 것도 이 때였다. 홍문관 시절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미암박물관이 건립되기 전 문적과 유물을 보관하던 모현관의 모습

미암의 박학다식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당나라 서예가 우세남(虞世南, 558년~638년)에 견줘질 정도다. 종가 뒤편 연못 한가운데 현대식 벽돌건물 모현관이 있다. 본래 문적과 유물 보관을 위해 뜻있는 인사들이 힘모아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습기가 차면서 보관이 힘들었다. 결국 현대식 유물전시관 마련이 관심사로 떠올랐고 많은 인사들이 힘써 노력한 덕분에 미암박물관이 탄생했다. 그러나 전시관 규모는 여전히 비좁다. 문적과 유물 일부만 전시돼 있다. 나머지는 여전히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미암에 대한 연구가 진행형인 셈이다. 나머지 사료들이 한 둘씩 햇빛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후학들의 끊임없는 연구로 미암의 삶과 행적을 더욱 빛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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