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중국인이 일생에 가장 가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베이징(北京)이라고 한다. 베이징에는 ‘사나이라면 일생동안 한 번은 올라야 하는’ 만리장성(长城)과 황제가 살던 자금성(故宫, 신중국의 최고지도부가 사는 중난하이(中南海)와 마오쩌둥 주석이 신중국 건국을 선포한 톈안먼(天安门) 광장이 있다. 중국어를 처음 배울 때 접하게 되는 교과서같은 ‘301구’에도 ‘不到長城非好漢’(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사나이가 아니다)이라는 경구가 있을 정도면 중국인이 얼마나 베이징을 사랑하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베이징은 중화인민공화국, 즉 ‘신중국’의 수도로서 새롭게 건설된 도시가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의 ‘연’(燕)나라의 수도였습니다. 지금 칭따오(靑島), 쉐화(雪花)와 더불어 중국 3대 맥주의 하나로 꼽히는 옌징(燕京)맥주는 바로 베이징의 옛 이름인 옌징을 차용한 것이다.

톈안먼이 신중국의 상징이자 ‘랜드마크’가 된 것은 마오쩌웅 주석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76년 마오가 사망하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의 공과(功過)에 대해 내부평가와 논란 끝에 마오의 초상화를 철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오시대의 종말과 함께 사라질 뻔한 마오쩌둥의 대형초상화는 그렇게 살아남아 신중국의 상징으로, 또 라오바이싱(老百姓)의 재물신으로 추앙받으면서, 매년 새로 교체되고 있다.

톈안먼 광장은 ‘문화대혁명’을 발발한 마오가 수십만의 홍위병들의 집회를 개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방에서 베이징에 상경한 농민이나 억울한 일을 당한 서민들이 하소연을 하는 장소로도 톈안먼 광장은 최적의 장소다. 억울한 일을 상급기관이나 법원 등에 호소하는 것을 중국에서는 ‘상방‘이라고 하는데 주로 농민이나 소수민족들이 톈안먼 광장에 와서 급속한 개발과정에서 토지를 빼앗기는 등의 억울한 사연에 대해 하소연을 하고 침묵 시위를 하곤 한다. 그래서 톈안먼광장은 경비가 삼엄하다. ‘사방으로 열린’ 광장이지만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검색대를 거쳐야 하고 전국인민대표대회 등의 정치행사가 열릴 때는 살벌할 정도로 광장출입을 제한하기도 한다.

텐안먼 광장의 색다른 볼거리는 일출과 일몰에 벌어지는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 게양과 하강식이다. 어스름 새벽에 거행되는 오성홍기 게양식을 보기위해 새벽부터 수많은 중국인들이 운집한 모습을 보는 것이 내게는 더 장관(壯觀)이었다.

사실 중국에서 ‘텐안먼’에 대한 언급자체가 불편할 때가 적지 않다. 바로 1989년 6월 4일 벌어진 ‘톈안먼사태’에 대한 어두운 기억 때문이다.

마오 사후 덩샤오핑의 지도아래 개혁개방정책을 전면에서 진두지휘하던 후야오방(胡耀邦)는 1987년 덩샤오핑 등의 혁명원로들의 완전한 2선후퇴를 추진하다가 갑작스레 실각했고 1989년 4월 15일 사망했다. 학생들이 톈안먼광장에 모여 후 전 총서기 추모에 나서면서 후야오방 추모집회는 어느 새 후 전 총서기에 대한 복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사태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정책 이후 경제적 불평등 심화와 태자당 등 특권계급의 부정부패 등에 대한 학생과 지식인의 대자보가 나붙으면서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과 민주화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에서는 후야오방의 뒤를 이어 총서기를 맡은 자오쯔양 등이 학생시위대와의 대화에 나서는 등 온건론을 펴기도 했지만 배후의 덩샤오핑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100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6월 초까지 톈안먼광장에 텐트를 치면서 단식농성을 지속하고 있었다. 6월 4일 새벽 인민해방군은 탱크를 앞세워 야음을 틈타 광장에 진입했다.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유혈사태가 빚어졌고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벌어졌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대학생과 지식인사회는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한)‘중국에서 다시는 민주화의 장미꽃이 피지 못하리라’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은 이처럼 복잡한 신중국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지켜보고 품고 있는 신중국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2019년 홍콩이 제2의 톈안먼처럼 전개되고 있어 우려스럽다. ‘송환법’ 사태는 홍콩시민들의 자유를 불편하게 했고 시위대에 밀리지 않겠다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강경대응자세는 톈안먼 사태와 버금가는 유혈사태도 불사하겠다는 충돌로 이어질 조짐이다. 30년 전에 비해 중국의 힘은 수십배나 더 커졌지만 중국은 전혀 성숙해지지 않았다.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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