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 장터에 나온 할머니들이 아빠와 장에 나온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앞에 놓인 둥근 호박처럼 잘 익은 세월을 얼굴 가득 담고, 늦은 가을 햇볕에 옹기종기 장터에 나앉으신 어머니들이 계신 곳이 기계 장터다. 봄부터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 벌써 다 자라 타지로 가버린 자식들을 돌봤듯이 어르고 보듬고 하며 키워서, 씻고 다듬어 보자기마다 싸서 이고 들고 오신 온갖 채소들 얼굴 자랑하는 곳, 손톱만한 싹부터 천둥 번개 치던 여름 장마 비, 푹푹 찌는 더위를 같이 지나 이제 겨우 말귀나 알아듣는가 싶은데 시집보내고 마는 딸들 같은 채소들을 오고 가는 장꾼들에게 선을 보이고 있는 곳. 옛 어머니들의 땅인 기계 장터다

건고추를 거래하는 모습

어지간한 벼락에도 끄덕 않는 영감 같은 담 옆의 대추나무 몇 그루에서 딴 비닐봉지 속의 대추하며, 아빠 따라 장에 나온 어린 손녀같이 말간 첫 무우하며 모두 자식 다루듯이 섬겨온 것들을 이고 와서 당신들의 인생처럼 이제 다 저물어 가는 한해의 따슨 가을 햇볕을 쬐고 있는 어머니들이 계신 곳이 기계 장터다.

가까운 포항이나 경주에서도 젊거나 중년쯤의 아낙들이 오래 전에 떠나 왔거나, 잃어버린 친정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우면 할 일없이 차를 몰아 찾아드는 곳, 잘 차려지고 깨끗한 대형마트와는 다른 세상이었던, 한 열 몇 해 전까지 북적였던 자신이 살았던 옛 읍의 시장터가 그리워 찾아가는 곳이 기계 장터다.

할머니의 치마폭에서 나온 동전 몇 닢으로 사주시던 국화빵 몇 개의 황홀한 미각이 생각나게 하는 곳, 누런 광목 포장 친 국수집에는 회색 두루마기 입으시고 두 손은 뒷짐 지신 할아버지 따라 온 어린 손자가 코를 훌쩍이며 잔치국수 가락을 코와 함께 넘기던 곳이 기계 장터다.

장터에 노란 메주콩 몇 되와 강낭콩을 담아 둔 채 슈퍼에 등을 기대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가을 빈 밭에 심어 한겨울을 밭에서 눈비 맞으며 북풍한설을 견딘 마늘, 여름에 캐서 두세 달을 햇볕에 바짝 말려 김장철 돌아오는 11월 쯤, 그믐달 같이 매운 향기 사방에 풍길 때쯤 잘룩하게 허리 대를 묶어서 상자에 담아둔 마늘 두어 접하며, 아들 떠난 빈 구들방에 아들 대신 널어 말리며 엉덩이라도 짓무를까 오며가며 쓸어주고 뒤적여준 붉디 붉은 고추 몇 자루하며, 시집가면 안방차지하고 마님노릇 할 줄 알고 부잣집이라 시집갔더니 층층시하 밥 수발에 병수발, 서방은 기생 끼고 앉았는데, 텃밭 귀퉁이 차지하고 흙담 너머 세상 구경하며 아이 다섯 낳아 키우면서도 호박꽃처럼 풍성하고 후덕하던 늙은 어머니 같은 호박하며, 그 귀하고 귀한 채소를 여기저기서 차로 실어온 요즘 세대의 젊은 트럭 장수는 그 물건들이 품은 시간도 다정도 쓸쓸함도 모르고, 돈 몇 푼에만 마음 두기도 하여 어머니 마음이 서운해지실까 걱정이 되기도 하는 기계 장터다.

아득한 얼굴로 노란 메주콩 몇 되와 강낭콩을 다라이에 담아 온 어머니는 슈퍼 찬 유리에 등을 기대고, 그 옆의 늙은 어머니는 긴 세월 걸어오신 다리가 탈이 나신 듯 겨우 벽을 짚고 섰다 앉았다를 반복하신다. 우리 모두의 옛 고향 읍의 장터 풍경이며, 이제 천천히 사라져가는 풍경을 옛날 영화처럼 보여주는 곳, 기계 장날 장터 모습이다.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 들어앉아있는 소중한 우리의 옛 시간을 아직도 아끼며 흘러가고 있는 곳, 기계 장터의 가을 풍경이다. /글 이을숙 시조시인

기계杞溪 장날 / 박목월

아우 보래이.
사람 한 평생
이러쿵 살아도
저러쿵 살아도
시큰둥 하구나.
누군
왜, 살아 가는 건가.
누군
왜, 살아 가는 건가.
그렁저렁
그저 살믄
오늘같이 기계杞溪장도 서고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아우님도
만나잖는가베.
앙 그렁가 잉
이 사람아.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저 살믄
오늘 같은 날
지게 목발 받쳐 놓고
어슬어슬한 산 비알 바라보며
한 잔 술로
소희도 풀잖은가.
그게 다
기막히는기라
다 그게
유정한기라

-박목월 시집 < 경상도의 가랑잎 (1968)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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