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여윈 햇살이 길게 그림자를 끌고 가는 오후, 길가 마른 질경이에 맑은 햇살 비친다. 한 생, 갈라지기는 했지만 꺾이지 않던 생명의 잔해를 위로라도 하려는 듯, 짧은 비침이지만 따뜻하다. 차라리 길에 싹을 틔워 밟히고 치이면서 자라기를 택한 저 질기고도 유한 질경이의 삶. 그 생존은 눈물겨웠다.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치열한 생존의 시간을 보낸 뒤, 옹골진 씨앗을 남기고 떠났으니 냉랭한 시월 상달의 기운조차 비껴 선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산야는 절정이었다. 눈부신 노란 은행나무를 만나지 않고는 길을 걸을 수 없었다. 나무의 한 생도 어떤 삶을 살았느냐로 단풍의 색깔이 결정 짓듯, 저마다의 색으로 세상을 불태웠다. 그러나 비 한 번 찔끔 뿌리니 잎 떨어지고, 찬바람 두어 번 불더니 대지는 싸늘한 기운에 잠기고 말았다. 이렇듯 계절은 며칠 사이에 만추를 지나 겨울로 향한다.
몰캉하게 말라가는 이웃집 감나무의 까치밥, 짧은 햇살 쫓아다니는 느릿느릿해진날것들의 날갯짓, 가을 결실을 지키다 바짝 늙어버린 허수아비에 기댄 들국화, 습기 잃은 들녘엔 숨탄 것들의 분주한 바삭거림과 마른 풀 향기만 그득하다. 시월 상달의 애절한 풍경이다.
음력으로 시월 상(上)달인 십일월이 가고 있다. 빈 들녘의 헛헛함과 맑은 하늘의 청결하고 겸허한 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십일월을 가장 거룩한 달로 여겼다. ‘조선상식문답’에서 ‘최남선’은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기게 되는 달이라 했다. 그래서 열두 달 가운데 으뜸가는 달로 생각하여 상(上)달이라 기록했다. 고대 제천의식은 모두 이 상달에 있었다. 어릴적 오빠들을 따라 마을동제를 보러가던 날도 이즈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희망과 삶의 생기가 움트는 축복의 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일 년 열두 달 주목 받지 못하는 달도 십일월이다. 별 존재감 없는 질경이와도 닮은 달이다. 그 흔한 비나 눈도 잘 내리지 않는다. 입동이 든 달이지만 큰 추위도 없다. 공휴일 하나 없고, 청첩장 하나 오지 않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려 가는 다리목이라 떠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달이다. 안쓰럽고 애처롭다. 십일월을 사랑한다는 사람도 별로 없다. 들뜨거나 화려함으로 예찬 일색인 시월과 부산하고 유의미한 십이월에 통과의례적 달이기 때문이다. 저 척박한 길가에서도 자기만의 영역과 자유로운 번식을 하고 말라가는 질경이 같은 달이기에 더욱 그렇다.
골목을 쓰는 힘찬 빗자루 소리에 창문을 연다. 분명 다른 사람의 빗질 소리다. 누굴까. 구부정한 어깨며 묵묵히 땅만 보고 대빗자루를 휘두르는 뒷모습이 최씨 아저씨다. 늘 휑한 눈을 하고 마치 태생이 높은 곳 쳐다볼 줄 모르는 사람처럼 바닥만 보고 다니는 내 이웃이다. 평생 독한 마음 한 번 먹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그렇다고 유쾌하고 붙임성 있어 보이는 인상도 아니다. 그가 어디서 온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도시 인근에 일거리가 많아 자연 생겨난 인력 사무실이 많은 동네라 일을 찾아 왔다가 정착한 이웃이다. 그러나 참 부지런하고 고마운 사람이다. 이웃하여 함께 살다 보니 정이 들었다. 오래 살다보니 이제는 그의 존재가 소중하기에 이르렀다.
일을 얻지 못하고 새벽 인력시장에서 되돌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동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일거리를 찾아 몸을 놀린다. 한창 낙엽으로 뭉개진 길에 그의 대빗자루가 한 번 지나가면 골목은 세수를 한 듯 말쑥해진다. 댓가를 바라거나 인기몰이를 하자는 의도도 아니다. 그저 하루 쉬니, 어디든 몸을 움직이는게 편하다고 한다.
건물청소를 하는 허리 아픈 아주머니들의 힘쓰는 일도 돕고, 딩구는 커피집 앞의 일회용 쓰레기도 치운다. 그런가 하면 남자의 손이 필요해 차일피일 미뤄두었던 독거 노인들의 힘든 일도 기꺼이 팔 걷어붙이고 나서준다. 보답으로 커피 한 잔이거나 담배 한 갑이라도 달게 받는다. 어린이집 운동장 풀을 뽑아주고 아이들이 건네는 과자 하나를 맛있게 먹는 아저씨를 본적이 있다.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어린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과 많이 닮아 있었다.
시월 상달에 그의 존재가 더욱 부각되는 것은 왜 일까. 아마도 존재감 조차 허락치 않는 한 사람의 진솔한 삶이 길가의 질경이와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메마른 땅에서 자란 나무가 뿌리를 깊이 박듯이, 어쩌면 사람도 적절한 목마름과 아쉬움과 부족함이 있어야 영혼의 눈을 더 뜨고 숨을 더 쉬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고 있는 이 달이 희망과 삶의 생기가 움트는 축복의 달이라면, 이 모든 것들에 감사할 일이다.
요즈음 불분명한 들썩거림들로 일신이 적막하다. 애매한 환절기에 뼈마디도 욱신거린다. 삶은 남루하여 모두 서늘하게 시월 상달을 견뎌내고 있다. 머잖아 첫 눈도 내릴 것이고, 조금은 음울하고 황량한 긴 동면의 기운에 잠길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더 고독해 진다해도 우리는 최씨 아저씨 같은 이들이 쓸어 놓은 길 위에 있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온 달. 그렇다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음력 시월 상달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