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시사평론가

도쿄 주재원 시절 사무실 대표 전화번호 뒷자리가 하필이면 12-12였다. ‘하나 둘 하나 둘’ 군사훈련 때 구호도 생각나지만 ‘십이 십이 사태’를 더 많이 떠올렸다. 2019년 12월 12일은 군사정변 발발 40년째 되는 날이다. 광화문을 밀어버릴 태세로 돌진하는 탱크 엔진 굉음, 균일하게 저벅거리는 군홧발 소리, 날카로운 호령과 복창, 불안한 시민들의 탄식,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절규들, 고막을 찢는 사이렌, 싸리나무가 타는듯한 독재자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환청이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월 12일 최규하 대통령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 군부를 제압하고 정권을 찬탈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항거한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8월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전두환은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된다.

신군부 등장의 빌미가 된 것은 유신독재 체제에 발생한 갑작스런 권력의 공백이었다. 그 해 10월 박정희 대통령 사망 소식에 이 땅의 민초들이 울었다. 눈물이라는 외견상 형식은 같겠지만 저 마다 느끼는 내면의 소회는 많이 달랐다. 보릿고개 가난을 극복하고 호롱불과 초가지붕을 벗어나게 해준 고마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독재 타도를 외치며 분신한 자식들의 허망한 희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팔 다리가 잘리거나 순직한 동료들 얼굴을 떠올리고, 고문 후유증으로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들이켜는 사람들, 이웃들 눈치를 보며 흘리는 가짜 눈물도 있었다.

늦가을 등굣길 담벼락 아래서 중학교 삼학년 필자가 왜 울먹였는지. 위의 어느 이유에 해당하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북한 괴뢰군이 쳐들어와 전쟁 난다’는 까까머리 소년들의 유언비어에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해묵은 가난을 이겨내고 고도 경제성장을 이뤄낸 공로를 폭압과 독재로 지워버린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면서 순박한 민중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화의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불안한 희망을 짓밟고 유신시대보다 더 혹독한 제5공화국이 시작되는 사건이 바로 '12 12 사태'였다.

신군부 핵심 허화평 전 의원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창원공단, 울산공단을 만드는 와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를 전두환 대통령이 마무리했다고 봐야 된다. 대한민국에 중산층이 생긴 것도 그때다. 중산층을 만든 게 전두환 정권이다. 그때 국민들이 ‘마이카’, ‘마이홈’이라는 꿈을 가졌다.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시대는 끝났으니 민간주도 경제 시대가 온 거다. 해방 이후 묶여 있던 규제를 푼 것도 그때다. 세간의 평가대로 독재를 하려고 했다면 통행금지도 풀지 않았을 거고, 여행 자유화도 허락 안했을 것이다. 연좌제를 폐지한 것도 5공 때다’ (중앙일보 2005.7.13)

제5공화국 주도세력들은 앞선 박정희 유신체제를 ‘인권·노동 탄압’ ‘국민주권 통제’ 정권이라 성토하며 선을 긋고 있다. 실상은 독재가 또 다른 독재로, 유신이 유사 유신으로, 군부가 신군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유신 겨울공화국을 경험한 이들은 지금도 악몽을 꾼다고 한다. 5공화국을 살았던 이들에게도 같은 공포와 울분이 남아 있다. 더 교묘한 억압이 5공에서 자행됐다고 기억한다. 유신 긴급조치의 인권탄압과 삼청교육대의 참상. YH 노동탄압과 청계피복노조 강제해산. 언론인들이 수시로 불려다니던 ‘빙고호텔’(서빙고분실)과 ‘국제해양연구소’(남영동 대공분실의 위장명)의 데자뷔. 1970년대 유신철폐 운동과 1987년 6월항쟁의 구호는 모두 ‘민주주의 회복’이었다. (경향신문 2018.10.22.)

최근에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 씨가 5·18 민주묘지를 방문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묘역에 참배하겠다는 뜻을 여러 번 밝히던 중 건강이 더 악화되자 '아들이라도 대신 가서 참배를 드리는 게 좋겠다’고 의사를 밝힌 것이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 2,628억원을 완납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아직도 본인의 과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리 사죄가 더 주목을 끌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추징금 2,205억원 중 절반 조금 넘은 1,184억원이 집행되고 1,021억원이 미납 상태다. 자진납부 약속을 뒤집고 연희동 집을 비롯한 남은 재산을 지키려는 전방위 법적 다툼에 나서고 있다. 멀쩡하게 골프를 치다가도 법이 다가가면 인지 결함을 내세운다. 매우 이성적이고 전략적인 대응행동이다. 이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참회의 시간을 갖는 게 어떨지.

‘신은 파멸시키려는 자에게서 먼저 이성을 빼앗는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구절이다. 신이 굳이 인간을 파멸시키겠는가 하는 의문으로 신 대신에 악마로 바꿔 읽어 보기도 한다. 악이 파멸시키려는 인간은 선의 편일 것 같아서 이 또한 개운치가 않다. 구원할 인간에게 신이 내리는 마지막 선물은 참회다.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