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사이드밀러 하나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다. 둔탁한 부딪힘 소리와 금속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놀란 자동차가 휘청거린다. 지뢰밭 같은 좁은 골목에서 애꾸가 되어버린 자동차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춘다. 순간 겁을 만났다.
좁은 골목길을 겁 없이 내달린 결과는 참담했다. 천지사방이 겁이란 사실을 잠깐 잊은 사이, 놈은 기다렸다는 듯 찾아왔다. 자초한 일이니 아량이나 배려 따윈 있을 턱이 없다. 놈을 모르고 덤빈 값은 성실히 치러야 한다. 망가진 사이드밀러며, 생채기 난 도어, 군데군데 망가뜨려 놓은 남의 값비싼 자동차를 보고 있노라니 겁의 된맛을 실감한다. 달아나버린 한쪽 사이드밀러 없이 목적지로 가야하는 것도 두려움이다. 그 뿐인가. 상대방 차주에게 사죄도 해야 하고 적잖은 숫자로 날아올 청구서를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얘진다. 무엇보다 당장 뻐근한 목덜미의 통증은 심각하다. 문득,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겁의 무게가 궁금해진다.
겁이란 놈은 만나는 순간 혼부터 빼앗아 가는 특징을 가졌다. 그 다음, 간을 콩알만 하게 만들어 버린다. 심장을 무말랭이 말리듯 쪼그라들게 한다. 서서히 조여 오는 두려움에 오금도 절이게 한다. 겁을 먹으면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이다.
그 끝에 따라오는 두려움의 질량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놈은 없는 듯 있다가 아주 미묘한 시점에 나타나 숨탄것들의 숨통을 죄는 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놈을 잠시 잊었거나 무지하게 덤볐다가는 불시에 놈의 라이트훅에 급소를 맞는다. 그것도 대가라는 급소를 정확하게 무게를 달아 날린다. 특히 우습게보거나 얕보는 것들에게는 에누리 없이 된맛을 보이는 무지막지한 습성도 가졌다. 겁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다양한 무게로 생명체들의 생존본능에 깊숙이 관여하는 겁. 그 무게는 얼마나 될까. 혹 색을 가졌다면 어떤 색일까. 흑, 아니면 백 중 획일적 선택이 아니라 수없이 다채로운 농도의 회색일 것 같다. 겁은 마주하는 이의 몫이다. 겁은 대하는 이는 저마다의 무게와 색으로 대응한다. 그 무게와 색을 가늠하는 것은 순전히 겁을 대하는 이의 몫이다 보니 누가, 얼마나,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놈도 우리가 잘 살아 가려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을 때는 겁이 뭔지 몰랐다. 당연히 타협하는 법도 몰랐다. 나이가 들고 세상과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공포와 두려움이 겁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모한 오기도 생겨나던 시절이라 놈과 한판 붙어 볼만 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 것은 오판이었다. 저 겁이란 부정적인 놈은 한판 붙어 아작 낼 놈이 아니라 적당히 알고 지내야 하는 놈이란 걸 나이 들면서 알았다.
겁은 생명체들이 무서운 존재를 미리 피하기 위해 발달시킨 생존 본능이다. 겁이라는 두려움은 죽음, 관계, 파괴, 병, 사고, 이별 등의 다양한 메뉴와 무게로 생명체의 생존본능을 자극한다. 천지사방에 도사리고 있다가 여차하면 무한 존재를 과시하려 대든다. 겁을 모르면 겁을 알고 대처하는 놈의 먹이게 되기 십상이다. 때문에 피해야 할 것은 무서워 할 수 있는 건강한 겁을 알 필요는 있다. 겁이란 상당히 부정적이긴 해도 우리가 잘 살아가려면 이놈을 알고 지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요즈음 하루하루 나기가 겁난다는 사람이 많다. 변화하는 여러 가지 것들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두렵다. 일상의 모든 것들조차 무섭고 믿을 사람 없어 겁나는 세상이다 보니 천지가 겁이다. 뭔가 실체도 없는 무서운 게 오는 것 같은 데 그게 뭔지 모른다. 변화라는 이름으로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아지고 있는 탓도 있고, 점점 험악해지는 사회 풍토도 원인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거나 경험한 것으로만 대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나이 들어 내 고통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까지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 타인이 느끼는 여러 종류의 겁들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나도 겪을 수 있음을 아는 나이다. 타인이 겪는 여러 가지 질병이나 죽음 같은 고통의 겁에서 무관심하거나 하룻밤 가십거리로 생각되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시련과 고통은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 불가피하다. 자신의 의지나 행동과는 아무 관련 없이 그냥 발생하는 것이니 자연 겁이 난다. 그러나 지레 겁을 먹고 정복되어 주눅 들어 살아갈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겁을 몰라서도 안 될 일이다. 적당하게 그 놈에게도 시선 줘가며 함께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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