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문화관광해설사

▲ 교룡산성 입구 계단
▲ 교룡산성 동문 왼쪽 성벽
▲ 동학농민운동 추모탑
전북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성은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진산인 해발 518m 교룡산 정상과 동쪽 푹 꺼진 계곡, 밀덕봉과 복덕봉 두 봉우리 사이에 축조된 포곡식 성곽이다.

축조 연대는 정확한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일설에는 삼국 통일전쟁 시기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 또는 설인귀(薛仁貴)가 쌓았다고도 한다. 신문왕 11년(691년)에 남원 소경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미뤄 이 ‘성’이 교룡산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백제가 축성한 산성이란 학설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축조 시기는 불분명하다.
조선 초기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산성의 둘레 1,125보, 군창이 있었다. 그밖에 별장청, 장대, 곡성창, 구례창, 염고, 장고, 군기, 산창 등 군사시설과 전쟁에 대비한 각종 저장고 등도 있었다. 성의 중요 요소인 우물이 99개소 있었고 민가도 100여 채가 있었다. 외침에 대비한 국가 주요 방어시설로 필수적인 시설은 모두 갖췄던 것이다.

동쪽 성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성벽아래에 사람 키 높이 석축이 성벽을 떠받치고 있다. 그 위에 크고 작은 비석 10기가 줄지어 서 있다. 산성 중수비, 별장, 장군 등의 비각이다. 교룡산성은 임진왜란 때 승병장 처영이 남원 방어를 위해 보수했고 조선후기 증·개축을 반복했다고 전해진다. 성벽은 자연석을 각 지게 쪼아 만든 성 돌을 사용했다. 성곽 높이는 5~8m 정도로 석축이 매우 견고하다. 교룡산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성곽은 험준한 산세를 따라가며 쌓아 성곽 또한 매우 가파르다. 산성은 동쪽 계곡이 주출입구다. 이곳에 동문 터가 있다. 원래는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지만 정유재란 때 붕괴됐다고 한다. 동문 터에는 현재 홍예문만 남아 있다. 과거 팔작지붕 누대가 그 위에 자리했을 것이다. 홍예문은 조선 후기 일반적인 성문 축조방식과 비슷하다. 성벽에 붙여 3단 장대석을 쌓고, 위에 9개의 아치형 돌을 얹었다. 다른 산성에서 보기 드문 석축이다. 교룡산성이 조선후기까지도 중요한 군사 전략적 방어시설이란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남아 있는 성문터,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 성문으로 진격하는 적을 공격하도록 설계된 옹성 등이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곽의 높이는 5~8m 정도로 산등성이를 따라 지은 석축도 매우 견고하다. 교룡산성은 1998년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복원중이다. 붕괴되지 않고 버텨준 성곽이 고맙기 그지없다.

교룡산성 가는 길은 쉽다. 입구 주차장에서 계단을 거쳐 홍예문을 들어서면 바로 성안이다. 성벽은 이곳에서 좌우로 산자락을 따라 길게 뻗어 올라간다. 양쪽으로 가파른 성곽을 따라 오르려면 숨이 찰 정도다. 성안으로 내리뻗어 올라가는 탐방로 옆에는 사찰 선국사가 있다. 3.1독립만세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스님이 첫 출가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오래된 역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들이 왜군과 대비한 전투에 거점으로 삼았을 것으로도 짐작된다. 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창건했다는 이 사찰은 근처에 용천이라는 샘이 있어 초기 용천사라 불리다가 후일 선국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뒷마당을 가로질러 나와 좀 더 오르면 대밭사이에 공터가 보인다. '군기 터'라고 새겨진 작은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무기 등을 보관하던 건물이 있었다는 뜻이다. 승병 또는 동학농민군이 군사조직을 갖추고 훈련했던 것이다. 이어 바로옆 가파른 산자락과 돌계단을 타고 더 올라가면 주초석만 남은 은적암 터가 나온다. 동학을 창시한 경주 출신 수운 최제우가 수행과 함께 저술을 하던 공간이다. 수운은 혹세무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관의 탄압을 받자 1861년 겨울, 경주에서 남원으로 피신하게 된다. 광한루 오작교 주변 약방에서 약재를 현금으로 바꾸려다가 약방주인 서형칠의 주선으로 안전하고 집필하기 좋은 교룡산성으로 가게된다. 수운은 산성에서 두 칸짜리 암자 덕밀암의 한 칸을 빌려 은적암이라 이름 짓고 수행에 들어간다. 수운은 이듬해 봄까지 한겨울을 머무르며 동학의 주요사상이 담긴 ‘권학가’ ‘논학문’ ‘수덕문’ 등을 저술한다. 밤에는 칼노래(검결)를 부르고 칼춤(검무)을 추며 심신을 단련하곤 했다. “시호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새로운 때가 왔다고 외친 것이다.

1894년 호남일대에서 발발한 동학농민전쟁도 교룡산성에 아픈 역사의 상흔을 안겨 주었다. 동학 태인 대접주 김개남이 전봉준과 함께 전주성을 함락시킨 후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관아를 점거할 때 이 성을 주둔지로 삼은 것이다. 김개남은 집강소 설치를 반대하는 남원부사를 처단하고 전라좌도 도회소를 설치했다. 폐정개혁을 단행하고 조직을 재편, 재기포를 준비했다. 이 때 외곽방비를 위해 교룡산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한 것이다. 이 때 전주성에서 농민군과 화약을 맺은 관군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오히려 청군과 일본군이 토벌에 나선다는 소문이 들렸다. 김개남은 재기포를 선언했다. 2차 기포에는 5, 6만 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한양도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기관총 등 신식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게 몰살당하다시피 한다. 교룡산성에 남아 있던 농민군도 관음지와 여원치 전투에서 운봉과 함양 민보군에게 크게 패한다. 김개남은 몸을 피해 매부의 집에 은신했다가 전남 태인에서 체포된다. 전주로 압송된 그 이듬해 초 전주 감영에서 처형된다. 전북에서는 전봉준 다음 가는 농민군 지도자로 평등세상을 꿈꾸며 싸워온 김개남의 비참한 최후였다.

교룡산성은 삼국시대 이래 근대까지 우리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성문 입구에는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 표지목이 외롭게 서 있다. 장기간 방치돼온 교룡산성은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계와 시민단체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수운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며 인간평등을 주장했다. 김개남 동학농민군은 폭정과 착취 압제를 일삼던 무능한 조정과 탐관오리를 향해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을 기치로 목숨 걸고 항거했다. 아직 못다 이룬 평등세상이지만 교룡산성에는 우리 선열의 숭고한 얼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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