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자금성 서쪽에는 호수가 있다. 명,청 시대에는 자금성의 정원이었고 지금은 시진핑 주석과 후진타오 전 주석 등 중국 공산당 전·현직 최고지도자들의 관저와 공산당 본부 및 중국 국무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금성(古宮) 관광에 나서지만 바로 왼쪽 편 호숫가에 중국 정치의 심장부가 들어서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지나친다. 중난하이와 북쪽으로 이어진 호수는 베이하이(北海)로 베이하이 공원과 베이징의 관광명소 스차하이(十刹海), 징산(竟山)공원 등이 있지만 ‘중난하이’는 일반인들이 전혀 모르는 비밀의 공간이다.
문화대혁명 발동 초기. 홍위병들이 이곳까지 떼로 몰려들어가서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던 류샤오치를 끌어내서 집단린치를 가하기도 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중난하이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 최고의 상류층이자 특권층이다. 시 주석 일가와 전직 최고지도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들의 집무실과 그들의 가족이 거주하는 집이 있는 곳이 중난하이(中南海)다. 전직 상무위원급들도 함께 거주하고 있다.그래서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되어 있고 경비가 삼엄하다.

중난하이에는 청정지역에서 특별하게 관리되면서 생산된 쌀과 고기 및 채소 생수 등의 생필품이 공급된다. 이들이 공급받는 물자는 신중국 성립직후부터 ‘터궁’(特供) 물자로 불렸다. 네이멍구 초원지대에서 방목으로 키운 소고기, 백두산 눈녹인 물로 재배한 쌀, 최고급 푸얼차, 옥룡설산 생수 등이 그것이다. 중난하이에 사는 고위지도자들의 자녀들은 그들만의 학교를 다니고 그들끼리의 학연으로도 맺어져있다.

중국정치의 3대 파벌을 ‘태자당’과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 ‘상하이방’(幇)으로 나누고 있는데 현 시 주석 등이 속해있는 정파가 바로 태자당이라면 전임 후진타오 전 주석은 공청단, 장쩌민 전 총서기는 상하이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중국 정치권력은 상하이방에서 공청단으로 이어서 태자당으로 순차적으로 균점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 권력이 이양될 때, 초기에는 공청단 출신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유력해보였다. 그러나 상하이방 방주인 장 전 총서기의 도움을 받은 태자당 시 주석이 권력을 잡기에 이르렀다. 장 전 총서기를 비롯한 상하이방은 상하이 당서기 출신인 그와 함께 일을 한 인연이 있거나 저장, 장시성 등 상하이 주변 출신인사, 장 전 총서기가 임명한 고위인사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태자당은 말 그대로 혁명원로나 중국공산당 간부의 자제나 친인척 집단이다. 즉 중국혁명의 주역들인 마오쩌둥, 덩샤오핑, 류샤오치 등 혁명원로의 자제, 가족이거나 공산당 최고위급 간부들의 자녀 및 그들과의 혼인을 통해 맺어진 인사들인 셈이다. 태자당 출신들이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초반, 문화대혁명 때 숙청됐다가 복권된 혁명원로들의 자제들에게 특혜를 준데다, 홍색(紅色)가문의 2세들은 ‘믿을 수 있는 피’라는 집단의식이 작용한 때문이다.
이들 태자당은 1세대에서 3세대까지 나눌 수 있는데 당·정·군 및 국유기업 등에 4,000여명이 포진하고 있다. 혁명 1세대들이 거의 사망한 데 이어 태자당 1세대는 리펑 전 총리와 장쩌민 등을 꼽는다. 상하이방의 태두인 장 전 총서기는 중국혁명투쟁중 사망해 ‘혁명열사’로 불리는 숙부 장상칭(江上青)의 양자라는 점에서 태자당 1세대로 분류하기도 한다. 따라서 편의상 태자당과 상하이방, 공청단이라는 파벌은 사람에 따라 중첩되기도 하고 향후 역학구도가 변화할 수도 있다.
태자당 2세대는 장쩌민시대 2인자로 불리기도 한 쩡칭홍(曾庆红)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위정성 전 상무위원, 류옌둥 천위안(陈元), 왕치산 등 문혁 이전에 대학을 졸업한 세대를 가리킨다.
이들 태자당이 장쩌민에 이어 후진타오를 거쳐 시진핑 시대를 맞아 권력전반에 걸쳐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시중쉰 전 국무원 부총리의 아들인 시 주석이 태자당 3세대의 핵심인물이 됐다. 리위안차오(李源潮) 전 국가부주석,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 류위안(刘源) 류샤오치 전 주석의 아들 등이다.
이제 명실상부한 태자당 전성시대다. 태자당세력이 당정청 정부기관 기업 및 문화계에 까지 전방위로 포진하고 있다.
‘태자당’이라는 집단이 처음 등장한 80년대 초반부터 그들은 라오바이싱(老百姓)과는 유리된 특권층이었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사태 당시 대학생들이 내건 주요 요구조건 중 하나가 태자당의 비리척결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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