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중국공산당의 당원은 2018년 말 9천만 명을 돌파했다. 매년 300-400만 명의 당원이 증가한다. 이같은 증가세를 감안하면 2022년에는 1억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14억 여명에 이르는 전체 인구의 6.4%가 공산당원인 셈이다. 여기에 14세~28세의 청년들이 가입하는 중국공산당청년단원(공청단)의 숫자도 2018년 말 8천만 명을 넘었다. 증가세는 엇비슷하다.

공청단은 중국 정치의 3대 세력 중 하나로 꼽히는 파벌로 시진핑 주석 직전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였던 후진타오 전 총서기의 지지기반이었다. 초대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역임한 후야오방(胡耀邦)전 총서기 시절, 공청단 출신 젊은 인재들이 대거 당·정·군의 핵심요직에 진출했다. 그러나 그가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하고 사망한 직후 1989년 톈안먼 사태 발발로 장쩌민 상하이 서기가 당 총서기에 깜짝 발탁되면서 ‘상하이방’이 탄생하자 한동안 공청단 출신은 기를 펴지 못하기도 했다. 상하이에서 장쩌민과 함께 일한 인사들이 대거 중앙무대로 올라갔다. 그들이 소위 ‘상하이방’이라는 파벌로 불리게 된다.

중국공산당과 중국공청단은 불가분의 관계다. 청소년 시절에는 공청단에 입단, 공산당원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고 인증과 심사를 받은 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공청단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공산당원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자격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중국정치를 주도하는 3대 파벌로 편의상 ‘태자당’과 ‘상하이방’, ‘공청단’ 등으로 나누고 있다. 그렇지만 공청단 경력이 있다고 해서 모두 공청단파(퇀파团派라고도 한다)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태자당’에 속하기도 하고 ‘상하이방’이 되기도 하듯이 최고지도자의 향배에 따라 중첩되거나 바뀌기도 한다. 시 총시기 체제의 19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리잔수(栗戰書)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공청단 경력이 있어도 산둥성 부성장 리짜이원의 종손자로,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후진타오 시대의 실력자 쩡칭홍 전 상무위원은 상하이방의 거두지만 태자당에 속하기도 한다.
제18기 정치국 상무위원이던 류윈산과 장더장, 장가오리 등도 지방 공청단 서기 경력을 갖고 있었지만 장쩌민 전 총서기 의해 발탁된 인사라는 점에서 ‘상하이방’으로 간주된다. 한정 역시 공청단 경력이 있지만 상하이방이다. 정치국 상무위원 등 공산당 핵심요직을 지낸 지도자급 인사들의 자제나 친인척들은 공청단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태자당이다.

따라서 시진핑 체제가 강화된 지금 시점에서 파벌간 권력투쟁이나 특정 정파의 득세나 약화를 주장하기는 데에는 선듯 동의하기 어렵다. 후진타오나 장쩌민 체제에 비해 시진핑 체제에서 당 총서기의 위상과 권한이 훨씬 더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1인 독재나 황제체제라고 하기보다는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라는 집단지도체제 방식이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출범한 제19기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7명의 면면을 보면, 공청단파는 리커창 총리 1인 밖에 없다. 리 상무위원장, 왕양(汪洋) 정협 주석, 왕후닝(王滬寧) 중앙서기처 서기, 자오러지(趙樂際)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한정(韓正) 상무부총리 등은 태자당이나 상하이방이다.
세력구도로는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합종연횡과 공청단 퇴조로 볼 수 있지만 시진핑 체제 강화로 보는 것이 맞다.
다른 측면에서는 상무위원 중 다수가 청소년시절에 공청단 활동을 활발히 하고 공산당에 입당해 경력을 쌓아왔다는 점에서 공청단의 퇴조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공청단의 대표주자였던 후진타오 퇴임 이후 공청단 제1서기 출신의 링지화의 몰락 등이 대외적으로는 공청단의 약화로 해석됐다. 그러나 여전히 8천만 여명에 이르는 공청단원의 숫자, 리커창 총리의 건재 등은 중국정치의 향배를 파벌간 대립구도로만 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베이징의 한인촌이 있는 왕징 부근에 가면 ‘북경청년정치학원’이 있다. 이 학원은 공청단 직속 대학으로 부속된 어학기관에서 중국어 어학연수를 하는 한국유학생 사이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이 학원이 2017년 1월부터 중국사회과학원 소속으로 변경되면서 ‘중국사회과학원대학’ 이 설립됐다. 이 대학에서 ‘청년정치학원‘이라는 이름이 빠지면서 공청단 색채가 사라지자 공청단이 약화된 것 이라는 분석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청년정치학원은 일부 학부과정을 사회과학원에 이관했지만 학원이 폐교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일부 학부과정과 석·박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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