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신중국은 진화하고 있다. 마오쩌둥(毛泽东)의 시대가 덩샤오핑(邓小平)과 장쩌민(江泽民)과 후진타오(胡锦涛)시대를 거쳐 시진핑(习近平)체제로 이어져왔지만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국가지도체제에는 변화가 없었다. 대기근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인류역사상 인간이 초래한 최악의 악몽을 겪은 바 있는 신중국에선 ‘한 시대’가 바뀔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난리를 겪곤 했다.
‘개혁개방’의 첫 시험대는 1989년 ‘톈안먼(天安门)사태’였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무대 전면에 내세우고는 사라졌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던’ 중국은 ‘WTO 가입’을 통해 세계경제에 본격적으로 진입,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주체로 활약하게 됐다. 후진타오로의 권력이양기인 2002~2003년 발병한 ‘사스’(SARS)사태는 급부상한 중국의 약점을 세상에 드러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은 그런 어수룩한 중국을 강대국으로 인식하는 포장재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시진핑 중국’은 중국굴기의 본격화 선언과도 다름없었다. 시 주석은 미국과의 대결 및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고 5G통신장비시장을 장악한 ‘화웨이 사태’는 미·중 패권다툼의 서막을 장식했다. 식탁에 앉아 주식(主食)은 커녕, ‘애피타이저’를 먹기도 전에 드러난 세계 최고라는 중국식만찬의 허술함은, 잘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시장에 내놓았지만 막상 시제품은 설익고 바닥은 타고 있는 삼층밥이 내뿜고 있는 중국산 압력밥솥이 풍긴 냄새와도 같았다.

‘코로나-19‘로 불리는 우한발 폐렴은 이런 중국의 감춰진 속살을 여지없이 까발리고 있다. 효율성을 자랑하는 중국공산당의 관료주의가 빚어낸 통계조작은 확진자가 10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여지없이 반쯤은 확인시켜줄 수 밖에 없게 됐다.
17년 전 베이징시장과 위생부장(보건복지부장관)을 경질하고서야 30명이 300명으로 사스통계가 바로잡혔듯이, 바이러스의 진원지인 우한시와 후베이성 당서기를 교체하자 확진자수가 하루사이에 1만5,000여명 늘어난 것도 판박이다. 사스 때처럼 코로나사태도 점차 수습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 그들이 추진하는 수순이다. 코로나사태도 그렇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 SNS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은 우울한 중국의 현재를 표현하고 있다. 우한 화장장에서 한줌의 재로 사라진 사람들이 남기고 간 휴대폰더미 사진이 그것이다. 효율성과 효용성을 자랑하는 중국의 지도체제가 빚어낸 비극. 개미새끼 한 마리도 잡아낼 수 있다는 촘촘한 CCTV의 감시와 통제를 자랑하는 ‘빅브라더’가 바이러스같은 보이지 않는 적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중화제국의 재건이라는 중국의 꿈은 중국인민, 라오바이싱(老百姓)의 신뢰를 잃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중국’이라고 규정한 중국의 실체는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중국이라는 이름의’ 각종 거짓의 홍수 속에서 중국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접촉하는 중국이라는 이름이 붙은 온갖 사물과 추상명사 중에서 무엇이 진짜 중국인지, 가짜 중국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을 떠올리면 ‘온갖 거짓의 집합체’로 바라보는 게 오히려 더 편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접하는 수입 중국산 농수산물과 공산품에 붙어있던 수식어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다수였다. 짝퉁과 엉터리, 싸구려라는 수식어가 늘 붙어 다녔고 한·중 수교 전이나 지금도 마찬가지로 중국을 ‘죽의 장막’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사라지지 않았다. ‘샤오미’(小米)가 대륙의 실수라는 반전으로 불리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산 제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크게 달랐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중국을 거짓의 대명사로만 불러서는 안되는 이유는 있다. 중국이라는 거짓은 구호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가 보고 있는 중국은 ‘백화제방’(百花齊放)같은 중국의 다양성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어두운 구석보다는 14억 라오바이싱의 역동성이 더 다채로운 곳이 중국이다. 통계조작과 정보의 은폐가 초래한 역병의 창궐같은 비극만이 아니라 감염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한시민들을 지키고 있는 우한의 의료진도 우리가 봐야 할 중국의 민낯이다. 그들의 통치시스템은 느리지만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복구시스템도 함께 갖고 있는 모양이다.
‘만리방화’는 낡은 시스템으로 증명되었다. 실시간 삭제하고 통제한다고 해도 용기있는 중국인들의 비판을 모두 잡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현재보다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중국인의 바람도 그들이 늘 마시는 ‘모리화’(茉莉花, 자스민)차처럼 스며들고 있다.

우리가 아는 중국이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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