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문화관광해설사

▲ 영원산성 입구 석문
▲ 성곽안쪽 층단 겸 계단
▲ 동편 암벽위 성곽 전경
‘섬강(蟾江)은 어듸메오 치악(雉岳)이 여긔로다’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 한 구절에 치악산이 나온다. 본래 적악산(赤岳山)이었으나 꿩의 보은 전설로 치악산(雉岳山)으로 바뀌었다. 전설은 뱀에게 잡아먹히려던 꿩을 구해 준 나그네가 위험에 처하자 그 꿩이 자신을 구해 준 은혜를 갚아 목숨을 구했다는 내용이다. 한반도 중부 내륙 치악산은 동쪽으로 횡성군 서쪽으로 원주시와 접해 있다. 남쪽 남대봉, 북쪽 매화산 등 고봉준령과 깊은 계곡으로 산세가 뛰어나지만 매우 험준하다. 기암괴석과 울창한 산림은 천하절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원산성은 치악산 남서쪽 자락에 걸쳐 천혜의 자연환경을 활용해 축성한 산성이다. 역사 이래 원주지역 방어에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산성으로 전해진다. 지리적으로는 향로봉, 남대봉, 시명봉에 둘러싸여 방어에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하다. 용이한 공격 루트로는 거리가 긴 금대계곡 한 곳뿐이다. 산성위에서는 아래로 사방이 환히 트여 적을 발견하기가 매우 쉽다. 인근 신림, 부곡, 행구 등 교통요지와 지리적으로 손쉽게 닿는다. 위치는 비록 해발 고도가 높은 산정이지만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임에는 틀림없다.

영원산성은 지형이 너무나 험준해 그간 등산객의 통행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다가 문화재청에서 1998년 문화적 가치를 인정했다. 이어 복원 5개년 계획이 세워졌고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성곽 진입을 위해서는 등산로에 목재 계단과 데크가 설치했다. 마침내 2016년 10월 영원산성 일대 탐방로겸 등산로 1.9km 전면 개방이 선언됐다. 가는 길은 치악산 탐방안내소 금대분소에서 영원사까지 금대계곡 2.4km 완만한 숲길을 따라 우선 걸어가야 한다. 이어 길이 끝나는 지점 영원사 입구에서 산위로 오른다. 대개 이 코스가 가장 무난하다고 한다. 산성까지는 이 곳에서 가파른 산길 600m 가량을 올라가야 한다. 과거에는 맨 흙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군데군데 험난한 구간마다 목재계단과 데크가 설치돼 있다. 조금 힘겹게 오르다 보면 해발 700~970m 정상 부근 바위틈 사이로 성곽이 모습을 드러낸다. 절 입구에서 능선을 따라 성벽까지는 약 30분이면 되지만 주봉까지 가려면 약 2시간이면 넉넉하다.

영원산성은 성벽을 가파른 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따라 쌓아 ‘포곡식’ 산성으로 분류된다. 성곽 밖은 매우 가파른 낭떠러지가 이어진다. 자칫 성곽위로 잘못 올라섰다간 무너질지도 모른다. 더구나 최근 복원하면서 쌓은 성벽은 그다지 튼튼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복원한 구간은 성곽 보호를 위해 옆길을 이용해 달라는 안내문이 앞뒤에 지키고 서 있다. 대부분 이런 구간은 등산객들이 직접 밟고 올라서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다만 지그재그 형 데크를 타고 접근하면 수월하다. 인근 산자락에 흩어진 자연석들을 모아 쌓은 성곽은 안쪽에 층단 또는 계단을 줄지어 쌓아 적 침입시 방어에 유리한 구조다. 성곽 윗부분 자체가 그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성가퀴(여장)가 되는 방식이다. 주봉 부근에서는 성내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인다. 산성보다 높은 지점에는 양쪽에 성벽 끄트머리가 솟아올라온 방어시설 용도(甬道)를 두었다. 능선을 타고 접근하는 적을 쉽게 찾아 공격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구조다. 성곽 밖 모서리마다 성벽을 길게 뽑아 능선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방어하기 쉽도록 했다. 동서남북 사방에 모두가 이런 구조여서 치밀성이 엿보인다. 영원산성은 신라 문무왕 또는 후삼국 시대 궁예가 활약할 당시 쌓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에 ‘후삼국 시대 궁예가 892년 (진성여왕 6년) 치악산 석남사를 근거지로 주변 마을을 공격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 시대 개축이 거듭됐고 전투에 본격 활용된 사실은 분명하다. 성문과 치성 구조, 성가퀴(여장) 등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산성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는 성벽 둘레가 3천749척(약 2.4km)이고 성안에는 우물 1개소 샘 5개소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지금 우물과 샘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 영원산성은 외침이 잦았던 고려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군사적 전략적 방어시설로 제 역할을 다했다. 특히 고려 충렬왕 17년 (1291년) 원나라 합단적이 침략했을 때 향공진사 원충갑(元沖甲)장군이 맞아 싸운 전장도 이곳이었다. 당시는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고 철령 이북에서 관군이 모두 도망간 풍전등화 위기상황이었다. 원충갑은 그러나 굴복하지 않았고 10여 차례나 격전 끝에 적을 패퇴시켰다. 조정에서 원주를 익흥도호부로 승격시키고 3년간 부역과 세곡을 면제시킨 것도 영원산성에서 이긴 공적에 힘입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영원산성은 원주목사 김제갑(金梯甲)이 관, 민 5천여 명을 이끌고 적을 맞아 혼연일체 싸운 혈전장이었다. 김제갑은 혼신을 다해 싸웠지만 몰려드는 왜적 앞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결국 전투 도중 왜적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부인 이 씨와 아들 시백도 뒤를 이어 자결했다. 전투에 참가한 관, 민들이 살아남은 이가 드물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원주시는 순직한 선조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해마다 음력 1월 21일 영원산성 대첩제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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