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시사평론가

얼마전 봉준호 감독이 칭송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 영화를 보고 원작을 다시 읽었다. 엔도 슈사쿠(遠藤 周作)의 ‘침묵’은 인간의 고통과 시련에 침묵하는 절대자를 향한 어느 사제의 절규를 담고 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으로 일본 전체에 약 40만의 기독교도가 있었다. 토요토미 무사 정권은 처음엔 이들을 허용했으나 나가사키 지역 민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약 4만명의 순교자가 발생하자 기독교를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고문과 순교를 앞두고 로드리고 신부는 신의 침묵 앞에서 인간의 형편을 살폈다. 인간의 죄악이란 바로 ‘인간이 한 사람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잊어버리는 것’이라 한다. 타인의 삶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며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 한 때나마 맺었던 인연을 까맣게 지워버리고 살아가는 개인주의를 엔도 슈사쿠는 무겁게 지적하고 있다.

역병과 괴질에 신의 뜻을 생각해 본다. 코로나를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양지 바른 곳에 모여서 농담으로 주고받을 상황도 아니다. 질병 관리본부 안내나 회사 방침이 게시될 때만 해도 나와는 상관이 없으려니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사건은 늘 우리의 안일함을 꾸짖는다. 이단 종교와 바이러스의 결합은 절묘하고도 무자비하다. 순식간에 온 나라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일본의 미숙한 바이러스 대응을 지적하려다 우리 나라가 일본 확진자 수치를 앞지를지 모른다는 뉴스에 당혹했다.

2월 19일 동창생 친구가 점심을 먹자고 연락이 왔다. 포항에 확진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동선이 아직 미치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또 이를 거절할 정도로 심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 친구 차에 타면서 마스크를 확실히 했다.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으로 고생했는데 다 나아간다는 말에 안도했다. 식사 후 커피도 함께 마셨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은 서로 나눌 일이 없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런 사실이 없었으니까.

다음날 2월 20일 목요일 점심은 사무실 동료 셋과 함께 했다. 오전에는 스무 명 정도가 참석하는 회의도 함께 했다. 금요일과 토요일도 평소와 다름없이 조심조심 지냈다. 그러던 중에 2월 22일 일요일 저녁에 점심을 함께 한 친구 사무실 여직원이 확진자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라움을 억누르며 바로 전화를 걸어 친구의 용태를 살폈다. 증세는 없으나 그 회사 사람들 전체가 자가 격리에 들어간다는 답변이었다. 점심을 함께 한 또 다른 친구에게 사실을 알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한다.

안도와 불안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직장 동료 카톡방이 생성되었다. 필자와 점심을 함께 한 친구 사무실 여직원 소식과 함께 바이러스 관련 상황을 공유하자는 내용이었다. 자가 격리자와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올렸다. 동료들 놀라는 표정이 카톡으로 감지된다. 아니나 다를까 전 가족이 바이러스 검사를 한 직원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부 관련기준은 없으나 스스로 판단하는 게 좋을 것이라 한다. 회의에 함께 참석한 다른 팀장은 회의 동석한 사실에 걱정을 표시했다. 월요일 출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스럽다. 회사 기준은 명확치가 않다. 1339로 전화를 해서 이런 경우 국가 관리지침을 확인해 본다. 접촉한 사람이 자가격리 중인 경우 명확한 관리 기준이 없다고 한다. 하긴 이런 경우를 다 고려하자면 우리 나라 인구의 절반은 족히 격리해야 할 것이다. 월요일 오전에 회사 상황실 입장을 확인하기로 하고 사상 초유의 온라인 예배 설교를 떠올리며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골몰히 생각한 탓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목구멍에 통증이 있는지 온 신경을 집중시켜 보기도 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생각하다 사이비 종교 집단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하필 그 친구가 그 때 점심을 먹자고 했는지 야속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하거나 비논리적인 일이라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린다. 할 수 있는 것은 가족과 친구의 건강과, 속히 국가적 위기가 해결되기를 기도하는 일이다.

살아오면서 삶이 덤으로 주어지는 사건들이 몇 번 있었다. 모든 과오를 뉘우치고 어떤 허물도 용서하고 물처럼 순순하게 살겠다고 맹세하던 일이다. 아내의 긴 산통을 숨죽이고 기다릴 때, 시카고 공항 착륙 중에 낙뢰로 심장이 멎을 뻔한 사태, 교통사고로 상대방이 다쳐 안타까웠던 기억, 가슴을 짓누르는 잘못을 용서받은 일 등이다. 그런 일들을 떠올리다 보니 최근 삶이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다시 용서를 빌었다. 덤으로 살겠다고 욕심부리지 않고 이웃을 배려하면서 살겠다던 굳은 맹세를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신뢰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겠다던 각오를 새롭게 했다.

결국 자가 격리한 사람과 접촉한 경우 대응 방침에 따라 필자도 재택 근무중이다. 안방에서 서재로 출근길 발걸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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