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그것은 바람의 몸짓이었다. 허공 어느 한 귀퉁이 마음 붙일 곳 없어 저리도 아우성인가.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 바람인지 묻지 않으니 좋은 곳이다. 반듯하지 않아도, 크지 않아도, 굳이 희지 않아도 되니 편한 곳이다.

도심 변두리 강변 궁도장, 다양한 모양의 바람자루들이 날리고 있다. 파란잔디를 깔고 누운 궁도장 모서리마다 바지랑대 끝 잠자리처럼 매달려 무시로 흔들리고 있다. 희고 빨간 띠를 두른 긴 자루들은 궁사들의 시선 앞에서 철철이, 나날이, 좀 전과 지금이 다른 바람을 맞느라 허공에서 분답다.

오늘 궁도장은 푸른 햇살 가득하다. 희멀건 구름이 잠깐 머물다 사라진 뒤의 달디 단 맑음이다. 이런 날 궁사들의 심장이 부푼다. 둑 너머 강이 있고 빤히 보이는 다리 너머 바다가 있는 곳이라 바람 잘 날 없는 곳이다. 이미 득달같이 달려온 비릿한 바닷바람, 슬쩍 둑을 넘어 온 풀 내 나는 강바람, 바람은 또 다른 바람을 만들어 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도심을 통과한 후끈한 바람까지 가세한 날이면 바람자루의 배는 종일 만삭이다. 가만히 보면 하루도 같은 방향 같은 모양의 바람자루가 아니다.

커다란 아귀 같은 입으로 삼킨 바람의 세기에 놀라 격렬한 몸부림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방향을 틀어주기도, 우물거리다 침조차 묻히지 못하고 급히 꼬리로 내려 보낸 뒤 짙은 한숨을 쉬기도, 진저리치듯 어깨를 떨다가 고개를 흔들기도 한다.

마침내 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내 달린다. 오직 일 방향으로 거스를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궁사의 팽팽한 팔과 예리한 눈이 침착하게 정 조준한 그곳, 과녁이다. 오직 저 나부끼는 바람자루에 의지해 떠난 먼 여정이다. 그러나 미세한 흔들림조차 살피고 가늠한 후의 출발이니 목적지를 향한 최적의 시위다.

화살의 질주본능에 바람자루가 긴장한다. 어차피 부딪혀야 할 때의 초연한 긴장감이다. 서남쪽 바람자루가 잔기침 같은 흔들거림을 보이지만 최상이다. 화살은 출발선상의 긴장감을 유지한 체 잠깐 좌우로 출렁이는가 싶더니 햇빛 속으로 솟아오른다. 강바람이 물비늘의 푸름을 안고와 휘감긴다. 풋풋한 향긋함이다.

때마침 접혀 있던 서북쪽 바람자루도 기지개를 켠다. 몸살기 있는 뻑적지근한 몸 풀기다. 긴 자루가 꿈틀거리며 몸피를 늘이고 입구는 하품하듯 벙 글어 바람을 맞는다. 비릿한 바다 바람의 정겨운 반김이다. 안단테 빠르기의 흔들림에 꼬리가 경쾌하게 흔들린다. 화살은 사색하듯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름없이 주저앉아 있는 빛바랜 풀 위의 마른 향기와도 한 호흡 짧은 입맞춤을 한다. 과녁을 향해 가는 길은 멀어도 아직은 순탄하다.

동남쪽 마른 구절초위의 바람자루가 펄럭이기 시작한다. 짧은 탄식 같은 긴장감이 찾아온다. 화살은 과녁을 향한 직진에 가속도를 붙인다. 이 순간 화살에게 바람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뚫고 나가야할 장애물일 뿐이다. 쉼의 반 박자가 필요한 순간이다.

냉기 머금은 쑥부쟁이 위를 지나 늙은 느티나무 곁을 지날 때 쯤, 북서쪽의 바람자루가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을 안고 격렬하게 온 몸으로 맞서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화살이 휘청거린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면 뚫고 나가야 하는 게 화살의 운명이다. 망설임 없이 하강의 속도를 줄이고 바람 속으로 돌진한다. 견딜 수 없는 고통자체보다 그 고통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순간이다.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에 꽂혀야 하는 이유다. 아직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있고 힘이 남아있다면 가랑잎처럼 흔들려도 과녁을 향해야만 하리. 그 힘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도록 잠시 동반해 준 바람자루를 위해서라도.

화살이 어떤 태도를 취해 목적지에 닿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기지 않았으리라 믿고 싶을 뿐이다.

숨쉬기가 어렵다. 상황은 퍽 위태로워 보인다. 마스크 속에 입과 코를 가두어버린 뒤, 오는 봄마저 빼앗겨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질병의 공포에 심신이 꼼짝없이 갇혀 지쳐가는 요즈음이다. 된장도 담아야하고, 겨우내 찌든 커텐도 빨아 산뜻한 봄맞이를 해야 하는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상황을 같이 버터야 한다. 함께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공감대로 이겨내야 한다. 모두의 공감대가 사라지면 나를 지탱해주는 지지대도 사라진다. 네 개의 바람자루를 믿고 과녁을 향해가는 화살의 신념처럼, 나보다 더 힘든 이웃을 생각하면서 함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매화나무에 꽃눈이 통통하게 오르고 있다. 쑥이며 지칭개 새싹들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희망과 기대가 움트는 계절, 함께 동행 하는 바람자루 같은 이웃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질병의 공포를 이겨낸 아름다운 봄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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