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도숲에 등을 기댄 감나무 커피집.
▲ 아직도 수줍음을 간직하신 할머니.
포항 송도 숲을 뒤에 두고 허물어진 시멘트 담 위에 잿빛과 바다 빛의 비닐로 된 낮은 지붕이 겨울 끝자락의 바닷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이집은 커피를 파는 포장마차다. 메뉴는 한방차와 믹스커피다. 어쩌다 들리는 손님은 뒤쪽으로 밝게 들어오는 햇빛과 일회용 컵에 담겨 나오는 따뜻한 차를 즐길 수 있다.

커피 집은 철거된 집터에 남은 담벼락과 감나무 두 그루에 끈을 매어 지붕을 덮고, 자리는 여름해변에 있을 법한 흰색의 둥근 탁자와 빨간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주인할머니는 오래 전부터 송도 숲에 산책 나오는 사람들에게 손수레로 이동하며 커피를 팔아오셨다고 한다. 최근 송도 산책길에 실개천이 생기고 잡상인 출입을 통제하니 허물어진 집을 얻어 자리를 잡으신 듯했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젊었을 적의 고운 태가 언뜻 보이고 세월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었지만 오래 고생한 티 없이 쾌활하셨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아직도 송도 소나무 숲을 떠나지 못하시고 빈 집터에 커피라 적은 작은 간판을 내걸고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할머니는 사람들을 대할 때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인정스러운 모습이셨으나 결코 비굴함이 없으셨고, 자기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며 살아온 사람만의 당당함이 배여 있었다.


주인할머니 연배의 동네 주민들이 둥글게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계시다 내가 들어가니 한마디씩 말씀을 하셨다. 나는 500원을 드리고 따뜻한 대추차를 받아 마시며 서쪽 벽 쪽에 앉아 송도 숲의 오후 햇빛을 즐겼다.

작은 출입문 너머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집 뒤쪽에는 넓은 소나무 숲이 솔바람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곳이었다. 담 벽에 붙어선 두 그루의 감나무를 보니 아마 허물어지기전의 이 집터에는 가족들이 모여 살며 일상을 함께 나누며, 어느 날은 행복했을 것이고 어느 날은 또 슬프기도 했으리라.


할머니의 커피집 앞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길옆에는 여러 브랜드 이름의 커피숍 간판을 건 새로 지은 건물들의 유리창이 반짝이고, 출입문 앞에는 자동차들이 즐비하고 젊은이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


아름다운 송도 해수욕장의 모래가 유실된 후 상인들과 주민들이 하나 둘 떠나고, 퇴락해가기만 하던 동네가 도로를 넓히고 모래사장을 만들고 주위 환경을 정비하고 나니, 오래되어 허물어진 집들은 철거되고 해변가 도로 갓길에는 새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고 소나무 숲과 면한 동네의 집들도 수리를 하여 음식점을 하는 집들이 많아졌다.

송도 숲길에는 실개천 길이 다듬어지고 산책객들의 발길이 잦아지니 여름이 되면 여러 문화행사와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그렇게 변해가는 동네에서 저만치 떨어진 구석자리에 할머니는 포장마차 잔 커피 파는 집을 열고 지나던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다가 문안으로 들어서면 반기는 인사와 함께 차를 따라주신다. 오래되어 허물어진 집의 빈터에서 누구를 기다리거나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사람처럼...

할머니의 인생은 옛날 송도 해수욕장의 푸른 솔숲에서 손수레를 끌고 커피를 팔던 그 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포항 송도 바다의 높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는 긴 세월의 변화를 다 보아왔고 묵묵히 건너왔기 때문이리라.


봄이 오면 죽은 듯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도 연록색 새싹이 돋아나고 이내 푸르고 넓은 감나무 잎들이 무성해지리라. 그 사이 노란 별 같은 감꽃이 무수히 달렸다 떨어지고, 떫디떫은 풋감도 수없이 맺혔다 떨어지고, 이윽고 감나무는 가을이 오면 발갛게 익은 감들을 등처럼 달고 서있으리라.

흰 종이컵에 따뜻한 믹스커피를 팔고 있는 할머니의 삶도 지금은 다 낡은 담에 기대선 겨울 감나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할머니가 지나오신 시간 속에는 수많은 감꽃과 떫은 풋감이 자리한 날들이 있었고, 마지막 겨울이 오기 전까지 자연의 섭리처럼 할머니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붉은 감처럼 잘 익은 그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며, 누구에게인가 혹은 자기 자신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이 되어주고, 머지않아 내려놓아야할 등불이 되어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이을숙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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