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문화관광해설사

▲ 명활산성 북문 터.
▲ 무너진 성벽.
▲ 반원형 치성.
▲ 북문 터 안쪽 전경.
▲ 정토암 가는 길 무너진 성벽.
경주보문관광단지는 연간 관광객 700만여 명이 찾는 국내 최대 관광지로 유명하다. 그러나 보문호반 동남쪽에 신라 수도 금성을 방어하던 산성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드물다. 아직 전체 성곽이 복원 안 돼, 북문 터 일대를 제외하곤 무너진 그대로다. 하지만 산성의 자취를 따라 돌다보면 신라 천년 문화유적지로서 그 가치가 충분히 느껴진다.

물론 지금까지 정확한 축성연대를 밝힌 기록은 없다. 그러나 명활산성은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신라 제18대 임금 실성왕 4년(405년) '왜가 명활산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실성왕은 즉위 1년(402년) 왜(倭)와 우호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낸다. 왜의 야욕을 잠재우려고 평화교린을 택한 것이다. 이후로도 왜의 명활산성 공격 기록은 쉴새없이 등장한다. 왜는 실성왕 4년에도 침략을 했다. 그러나 직접 기병을 거느리고 퇴로를 막은 실성왕에 의해 300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힌다. 명활산성이 그 이전에도 있었다는 얘기다. 명활산성이 왜의 침략이 극심하던 시기 수도 서라벌 침범에 대비하기 위한 산성이었던 것이다. 눌지왕 15년 (431년)에는 왜가 명활산성을 포위하고 점령을 시도하는 위기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자비왕 16년 (473년) 7월에는 산성을 개수하고 475년 정월 아예 궁궐을 옮겨 거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의 삼국 정세를 보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성(阿且城)에서 살해되면서 아들 문주왕이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긴다. 고구려는 죽령과 동해안 남진으로 신라를 압박했다. 자비왕이 명활산성으로 옮긴 것도 이에 대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소지왕 때 이르러 왕궁은 다시 반월성으로 옮겨간다. 한 시기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하고 신라 수도 금성(金城) 방어에 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새였던 것이다. 아울러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 등과 함께 동해를 노리는 왜구 방어에도 큰 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 16년(647)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명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반란은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女主不能善理)' 명분으로 거사했으나 곧 진압됐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반란이 나자 금성에 큰 별이 떨어지는 등 민심이 흉흉해진다. 비담은 반란의 성공을 장담하며 득의만만하게 된다. 그러자 김유신 장군이 한밤중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연에 매달아 하늘로 띄워 날리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 민심을 되찾고는 평정하게 된다. 이는 수년전 방송드라마 '선덕여왕'에도 방영돼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산성은 신라 멸망과 고려의 개경 천도이후 장기간 방치돼왔다. 삼국시대 중요한 역사적 유적지임에도 해방이후 2010년도까지 발굴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둘레는 약 6km, 면적은 96만㎡에 이르는 꽤 큰 규모의 산성이다. 서북쪽은 산세를 이용한 토성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방어능력을 강화해야할 동해안 쪽에는 돌로 쌓았다. 진흥왕 15년(554년) 개축했을 때는 둘레가 1천906보였고, 진평왕 15년(593년) 재축 때는 3천보였다고 한다. 다듬지 않은 성돌 쌓기는 신라 초기 축성방식이다. 하부 성벽 가운데 자연석을 그대로 쌓던 시기는 초기 축성한 진평왕 때였다. 삼국시대 명활산성에 대한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더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해방이후 지금까지 방치돼 있었다는 점에서 당국의 무관심은 상상 밖으로 보여 진다. 70년대 개발된 인근 보문관광단지의 급부상에 반해서는 더욱 서운하다. 명활산성은 1989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셀마'로 뒤늦게 처음 주목받았다. 성벽이 붕괴돼 실시된 긴급 발굴조사 덕분이었다. 온전한 축성비가 발굴된 시기도 이즈음이었다. 비문에서 축성 관리와 동원 백성 출신지, 촌주, 실무자명, 구간, 공기, 비석 위치, 높이와 길이, 책임자 등의 정보가 다량 확인됐다. 551년 11월 15일 쌓기 시작해 12월 20일까지 35일 걸렸다는 기록도 있다. '군(郡)' 글자도 확인됐다. 군제 행정구역을 뜻하는 소중한 자료였다. 마침내 2010년대 초 당국이 발굴과 복원에 나섰다. 첫 성과는 북문 터 일대 옛 모습을 되살린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고대 산성에서 좀체 볼 수 없는 반원형 치성이 윤곽을 드러내 관심을 모았다. 이런 형태는 보은 삼년산성과 문경 고모산성에 이어 세 번째라고 한다. 평기와와 철판, 쇠못 등의 유물도 다량 출토됐다. 그중 기둥을 바닥에 고정하는 '확쇠'는 목재로 만든 성문의 존재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명활산성은 보문관광단지 숲머리 진입도로변 북문 터를 답사 기점으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 북문 안을 들어서면 성벽 둘레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저 멀리 보문호반이 눈 아래 시원하게 펼쳐진다. 반원형 치성도 내려다보인다. 곧장 가면 무너진 성돌 무더기가 죽 이어진다. 성벽은 숲이 무성한 여름은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어렵다. 그러나 나무가 앙상한 겨울에는 확연하게 보인다. 그저 돌무더기로만 보일 정도로 붕괴구간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사람의 키를 훌쩍 넘게 남아 있는 구간은 옛 성벽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보문호반이 성벽위로 올라서야만 내려다 보일만큼 높게 남아 있다. 이 구간을 지나면 성안에 남은 옛 사찰 '정토암'이다. 성벽은 암자 입구에서 일제강점기 세운 명활산성 표석을 따라 다시 산길로 이어진다. 그러나 유일한 산성의 흔적인 돌무더기는 점차 흐릿해진다. 수풀을 뒤져가며 흔적을 찾아야 한다. 동남쪽은 '석성(石城)'이지만 서북쪽은 토성(土城)이란 얘기가 떠오른다. 등산로라고도 할 수 없는 산성안길에는 명활산 정상으로 갈 때까지 드문드문 무덤이 보인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지만 계속 가면 정상이다. 다시 봉우리를 지나 하산하면 다시 북문 터 입구가 나온다. 명활산성은 지금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하루빨리 제 모습을 되찾아 여행과 관광 역사문화공간으로 우리 국민 곁에 다가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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