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문 한동대 교수

모처럼 주말을 맞아 환호해맞이공원을 출발하여 형산강둔치를 거쳐 양동마을일대까지 한차례 돌아보았다. 도중에 자주 차를 세우고 아름다운 형산강의 물결을 바라보며 이편저편 강변마을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었다. 이 형산강은 저 멀리 울주군에서 발원하여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흐르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이다.

한반도에는 구석기시절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시절 사람들은 대개 바닷가나 강을 따라 조개, 물고기 등을 수렵하며 살았기에 멀리 북방과 남방에서부터 한반도 해안을 타고 형산강이 있는 이 지역까지 도달했을 것 같다. 지금도 울산의 암각화만이 아니라 포항지역 여러 곳에서 암각화와 석기들이 발견되는데, 크게 훼손되어서 잘 눈에 뜨이지는 않으나 잘 찾아보면 더 많은 것들이 더 많은 장소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본다.

특히 이 형산강은 신라시대 서라벌로 통하는 뱃길이었다. 고려며 조선시대로 오면서 개경이 주요 국제항으로 개발되었다고 보지만, 신라시대에는 수도인 서라벌로 통하는 뱃길이 형산강이었다.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큰 배들은 포항과 경주의 접경에 위치한 부조장에 정박했다. 좀 더 작은 배들은 서라벌 중심지까지 운항이 가능했는데, 물길을 거슬러 가야하기에 일부지역에서는 강가에서 말들이 배를 끌기도 했다고 한다. 부조장에서 우마차로 짐을 옮기더라도 서라벌까지는 높은 고개 없는 평야지대라서 운송이 편리했다고 한다. 지금의 울산 태화강변에도 염포라는 제법 큰 항만이 있었다고 하지만 서라벌까지 운송작업이 고개를 넘어야 하는 등 훨씬 불편했었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신라는 다른 나라들과 교역이 융성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역사드라마에서 보듯이 그 당시 서라벌에서 보여지는, 아라비아상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나라의 상인들과 물건들이 대부분 이 형산강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환동해권 북방에 위치한 고구려 상인들도 이곳을 통해 드나들었을 것이다. 당연히 왜구들도 쳐들어왔는데, 이곳은 방어가 튼튼하여 대부분 곡창이 있는 흥해/청하 변방의 해변으로 습격했다고 한다. 신라말기 고구려가 남진을 하여 바닷가인 청하지역까지 내려왔는데, 그곳이 곡창지대이기도 하지만 신라말기에 극성인 왜구들을 대신 격퇴한다는 명분하에 그곳까지 내려 온 것이 아닐까?

이 형산강과 영일만 바다는 50~60년전만 해도 물고기와 조개류가 아주 풍부했다고 한다. 당연히 고래들도 많이 서식했는데, 때로는 멸치떼를 쫓아 고래들이 형산강으로 올라갔다가 모래·뻘에 얹히기도 했다고 한다. 이 당시만 해도 이로 인해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았고, 동빈내항이 지역의 중심어항이었는데, 항구에는 정어리가 산같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지역이 산업화되고 항만이 크게 발달되어 물고기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지금도 연안어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남아 있고 낚시꾼들도 적지 않게 몰리는 곳이 이곳 형산강과 영일만이다.

지금도 지자체와 시민들이 이곳 형산강의 생태계를 되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상류로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생활폐수, 축산폐수, 산업폐수 등이 적지 않게 배출되어 줄어든 수량과 더불어 수질을 크게 오염시켰는데, 이제는 많은 노력 끝에 매우 좋아진 모습을 보이니 다행이라고 본다. 하지만 물고기 등 생태계 복원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본다.

이 형산강 하류 물줄기는 여러 차례 정리된바 있는데, 가장 최근이 포스코 건설시 유로변경이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를 지닌 것은 일제강점기의 홍수방지 등을 위한 유로변경 및 제방공사였다고 본다. 이때 이용된 석재들이 대부분 성곽 등 우리의 역사유적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성곽들은 물론이고 많은 유적지들이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아진다. 이러한 사례가 형산강제방 축성때 만이 아니고 경주시내를 관통하는 동해선 철도 부설 시에도 크게 벌어졌다 한다. 그 당시 일제도 역사유적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를 조작해 그 내용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바꾸었듯이 이지역의 오랜 유적들도 의도적으로 파괴했음이 짐작된다.

지금 천년고도 경주에 지상에 남은 고적이 적은 이유와 그 당시의 주거형태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몽골족의 침입을 비롯하여 왜란·호란 등으로 대궐, 사찰, 주거지 등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전 복원된 황룡사 9층탑도 기록만 남아 있는 것을, 수 없는 시뮬레이션을 거쳐 완성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20세기 초중반에 우리나라를 병합한 일제의 말살정책이 우리의 조금 남은 유적조차 파괴해 버렸다. 정말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국민들을 어렵게도 하지만 역사가 의도적으로 지워지고 조작된다는 것인데, 우리 민족으로서는 얼마나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가 할일 중 하나가 사라진 역사를 찾아내고 유적을 발굴·복원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만 하는 일이 아니고 지자체와 시민들 모두의 몫이라고 본다.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