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 문화관광해설사
답사는 산성 입구격인 동문 터에서 오른쪽 성벽을 타고 밀성대를 거쳐 북사면을 따라 축융봉에 오르는 코스와 임도를 따라 공민왕당을 거쳐 축융봉에 오르는 두 코스로 대별된다. 그러나 조금 힘겹더라도 성벽과 암벽을 타고 옹성이 있는 밀성대로 바로 올라가는 코스가 제격이다. 산성 안에는 곳곳에 건물 터, 성문 터 등이 남아 있다. 동문 터에서 오른쪽 바위산으로 쌓아 올라간 성벽은 일부 구간 험준한 바위를 그대로 활용했다. 지대가 낮은 빈 공간은 다듬은 정방형 돌로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높이 올라가야 하는 급경사 구간에는 계단을 만들었다. 장대 겸 옹성은 양의 내장처럼 길게 한 바퀴 휘감아 나간 형태다. 옹성은 절벽 아래에서 위로 암벽에 붙여 올라가며 다듬은 성돌을 높게 쌓았다. 옹성 안에는 장대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밀성대가 정자처럼 복원돼 있다. 옹성 주변 성벽 쌓기는 둘러가며 능선을 깍고 성돌을 차곡차곡 쌓는 내탁식 공법이 엿보인다. 밀성대는 산성의 동북쪽에 자리해 있다. 이곳에서 북사면 성벽과 남사면 성벽이 갈라진다. 축융봉 정상은 북사면 성벽을 타고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급경사 구간에는 성 안쪽에 계단처럼 데크가 설치돼 수월하다. 북사면 성벽은 성안에서 보면 지면과 거의 맞닿아 있다. 하지만 외곽은 높이 5~6m 또는 그 이상의 절벽이어서 까마득하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폭 4~5m 성벽은 길게 산정까지 이어지다가 북문지 가까이 끊어지고 평탄한 토성 흔적만 이어진다. 북사면 성벽위에서는 건너편 청량사와 응진암, 청량산 6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장인봉과 선학봉, 하늘다리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눈길을 산 아래로 돌리면 오마대로가 가느다란 흰 실처럼 길게 이어져 있다. 토성에 이어 나타난 성벽을 조금 더 가면 북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을 지나 산위로 난 긴 계단을 올라서면 축융봉 정상이다. 산성 안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산성 입구에서 1.4km 임도를 타고 가야 한다. 그러나 축융봉에서 하산하는 길에도 만난다. 산성마을 뒤편 큰 바위아래에는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 '광감전'이 있다. 방안에는 공민왕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벽면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여의주를 문 두 마리 '용'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집이다. 다른 집과 달리 툇마루가 설치된 점이 특이하다. 고려 31대 공민왕(1330~1374)은 2차 홍건적의 난(1361)을 피해 이곳 산성으로 몽진해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환도 후 개혁정치를 펴다가 노국공주가 죽은 뒤 후계자 문제로 신하들에 의해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사당은 주민들이 왕이 베푼 감화를 잊지 못해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해마다 제사를 올리는데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왕을 동신(洞神)으로 받들며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해온 것이다. 청량산에는 공민왕당뿐만 아니라 노국공주를 기리는 부인당과 어머니를 모신 왕모당, 딸당, 사위당 등 일가족 사당이 10여 곳 흩어져 있다. 현재 공민왕당은 2006년 봉화군에서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개축했다. 청량산에는 공민왕에 대한 일화와 유적이 유난히 많다. 이유는 왕이 최후 거점으로 삼아 산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군율을 어긴 죄수를 절벽아래 떠밀어 처형했다는 밀성대(密城臺), 다섯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지나갔다는 오마도(五馬道) 등이 그것이다. 민초들과 공민왕의 길고 긴 인연이 600여 년 넘게 지속돼온 청량산성 답사는 그 옛날의 신비로움을 새롭게 느끼게 해준다.
대경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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