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희특(한학자·서예가)

옛날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목공(穆公)이 당시 패제후(覇諸侯)의 지위에 올랐다. 목공이 패자로까지 부각되기에 이른 것은 백리해(百里奚)와 같은 훌륭한 신하가 있었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인재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목공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중원 천지에 국적을 불문하고 어느 누구든 간에 우리 진나라를 강성하게 할 기개를 펼쳐 보이는 자에게는 높은 벼슬과 선물을 하사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방방곡곡에 붙였다.

그 무렵 위(魏)나라에 공손앙(公孫鞅)이라는 사람이 관직에 있었는데 공손앙은 일찍 형명(刑名)에 관한 학문에 몰입하여 사람의 지은 죄를 어떻게 다스려야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고대로부터 예치(禮治)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인성의 선악을 다스리는데 있어 잘못된 습성에 젖어든 사악한 행동을 제약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법이란 성역이 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공평성, 공개성, 확실성, 강제성을 강조하여 정치에 반영되도록 노력하였으나 당시 집권자가 법을 잘 지키지 않았으므로 법치라기보다는 인치(人治)라고 할 수 있었다.

공손앙은 당시 위나라 혜공에게 자기의 정치이념을 설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앉자 진나라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진(秦)나라로 옮겨갔다.

그 무렵 진나라에서는 인재를 구한다는 포고문을 읽고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정치이론들을 내세우며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 중에는 유가, 묵가, 병가, 법가들이 운집하였으나 공손앙은 벼슬하는 일을 뒤로 미루고 진나라를 살펴보기로 하고 나라 전체를 두루 돌아다녔다.

광활하고 비옥한 땅이며 개발되지 않은 장원들이 막강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판단아래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인재를 구하는 총책을 맡고 있는 경감(景監)의 집 식객으로 들어갔다. 공손앙은 경감의 집안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진효공에게 추천되었는데 공손앙은 효공을 알현하고 성왕(聖王)의 도덕정치 이념과 패자들의 부국강병책에 대해 설명하자 효공은 덕치에는 관심이 없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래서 공손앙은 자기가 정립해온 법에 대한 이론을 정책에 반영시키면서 형 집행방법들을 수집 정리했다.

체형으로는 불알을 까는 궁(宮), 발꿈치를 자르는 월(刖), 코를 베는 의(劓),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경(鯨), 머리를 깎는 곤(髡), 채찍을 가하는 편(鞭), 볼기를 치는 태(苔), 수갑을 채우는 곡(悎), 갈빗대를 뽑는 추협(抽脇), 귀를 뚫어버리는 관이(貫耳) 등의 형벌을 개발하면서 ‘지혜로운 자는 작법(作法)하며 어리석은 자는 법을 따른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나라는 부강했으나 법에 의한 폐단 또한 없지 않았다. 한번 만들어진 법은 오래도록 그 효력이 있어 중국전체의 역사를 집대성하여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도 궁형(宮刑)을 받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며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 국민들은 우매하여 법을 잘 지키는데 법을 만들 수 있는 지혜를 가진 높은 사람들이 법을 어기는 사례가 더러는 있으니 부정, 비리, 폭력, 무질서 등 복잡하고 혼탁한 현실사회를 바로 잡는 길은 윗사람의 솔선 없이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며, 돈과 결탁하여 양심을 팔아 부정입학시킨 지성인으로 자처하는 대학교수들은 과연 지자(智者)의 소치인가? 초록이 대지를 수놓고 있는 이 여름에 자연의 순리에 따라 열심히 일하면서 정직하게 법대로 아름다운 삶을 구가하는 평범한 양심으로 돌아가자.

저작권자 © 대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