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포 포항명성교회 담임목사

인간은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서도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거나 신체적인 건강의 복구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죽어가는 규정을 미리 규정된 관습에 따라 경험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죽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죽는 기술, 즉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 에 관한 안내서가 큰 인기를 끌었다. 1415년에 라틴어로 출판된 중세 판은 유럽 전역에서 100쇄 넘게 출판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도, 자기연민도, 신의 용서 외에 다른 희망도 품지 말고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지금까지 지은 죄를 회개하는 한편 세속적인 소유와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안내서에는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기도와 마지막 순간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도록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 담겨있다. 다시말해 임종은 존중과 경의를 표하는 특별한 자리가 되도록 했다.

2008년 ‘암에 대처하기’ 라는 전국 규모 프로젝트에서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말기 암 환자가 기계적인 인공호흡, 전기적 심폐소생술, 심장압박, 치료 등을 받았거나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중환자실에 들어가 집중 치료를 받았을 경우 그런 인위적 개입을 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마지막 일주일에 경험한 삶의 질이 훨씬 나빴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늘날 비참한 질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는 건 예외적인 일이 됐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멈출 수 없는 상황이 올 때까지 오랜 의학적 투쟁을 벌인 끝에 죽음을 맞는다. 말기암, 치매, 파킨슨병, 장기부전(가장 흔한 경우는 심장이고 그 다음은 페, 신장, 간, 등이 잇는다) 혹은 너무 나이 들어 나타나는 노환의 축적 등으로 죽음에 이른다. 이 모든 단계의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죽음의 시기는 불투명하다. 우리 모두는 이 죽음이라는 불확실성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 죽음이라는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언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두고 싸우는 있는 것이다.

임종의 말은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의학기술은 의식이 없어지고 신체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도 각 기관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죽어가는 사람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질 때까지 의학적 처치를 해대는 마당에 환자가 생각하는 바와 바라는 바를 돌볼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말기암, 치매, 혹은 불치의 심장질환을 가진 사람들에게 죽음을 이야기해주고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고 교육하는 일은 단순히 환자의 생명을 연명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인생에게 주어진 질문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실존의 문제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의료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더 벌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당사자들에게 큰 고통이고 불행한 일이다. 이제는 잠시 통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고 인위적으로 가능한 오래 의식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사람은 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살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혈관에 화학약품을 투여하고, 목구멍에 관을 삽입하고, 살에 주사 바늘과 수술로 꿰맨 자국을 가진 채, 죽어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단축시키고, 삶의 질을 더욱 악화 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의료인들의 책임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은 한 번 죽는다. 생이 끝나 가는 걸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의료진들이나 호스피스 그리고 환자 가족들은 마지막 가는 사람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간다운 마무리를 할수 있도록 따뜻한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 할수 있도록 도와주고 배려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노화나 질병으로 인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너무 깊이 개입해서 손 보고,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를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놔도 괜찮습니다. 살기 위해서 더 이상 몸무림 치거나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금방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세상에는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은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간다운 죽음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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