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걸 전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사상의 주류 이룬 유학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에는 조선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수행한 허성(성리학자·후에 이조 판서)은 일본의 학자 승려 순슈자 [舜首座·그는 후에 유학자로 개종하여 일본 주자학파의 비조로, 이름을 후지와라 세이가(藤原惺窩)로 개명했다]와 만나 유·불 교의에 대하여 필담하면서 그에게 많은 자각을 시사한 바도 있다.

이 무렵에 일본에서는 고금 백가의 서적을 수집하면서 우리나라 제현들의 경사자집의 서적도 아울러 수집하였다. 그 중에서 현인들의 서적 가운데 이황의 『퇴계집』을 가장 많이 읽었으며, 그들은 매번 조선통신사들에게 퇴계(이황)·고봉(기대승)·포은(정몽주)·율곡(이이)선생 등은 유학의 연원과 진리를 터득한 분으로, 성리학과 양명학의 선철(先哲)의 사종(師宗)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는 이헌영이 신사유람단의 한사람으로 일본에 갔을 때 덕망이 있는 일본의 시게노 야수스구를 만나 대화중에 고려 때의 것으로 『익재집』과 조선조 때의 『퇴계집』을 구하여 소중히 간직하며, 이 두 분은 거유석학(巨儒碩學)으로 존경한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말하는 유학은 신유학으로 성리학·이학·정주학·도학·송학 등으로도 일컬어지며 옛날의 공자 맹자 중심의 근본적인 유학을 철학적으로 다시 정립할 새로운 학문으로 마음을 바깥으로 돌리기보다는 안으로 끌어 자성과 성찰을 쌓아 마음속에 움직이는 존엄한 생명력을 인식하는 실천적 수양학으로 승화시킨 것이 신유학의 진수인 것이다.

이와 같은 학문이 조선에서 성리학적 유학의 계승과 발전적 진전으로 그 사상이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그들이 감복하고, 명나라의 나정암(羅整庵)이 쓴 『곤지기(困知記)』설을 압도하는 차원 높은 철학이라고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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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위에서 말한 도서수집의 불서 전행에서 유불 병용기로 접어들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그 전쟁을 계기로 그 많은 조선 서적이 일본으로 약탈당했으며 도요토미는 그 탈취본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해 보겠다는 구상도 해보지 못한 채 1598년에 죽고 말았다.

그 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서(儒書)의 절대 진서(珍書)를 간파하고, 정권적 차원에서 정책에 반영한 것이 주효가 되었다.
그리하여 인재를 발군의 유생(儒生)에서 취하고, 그들의 내재된 특성은 무엇보다 유교의 교의(敎義)에 바탕을 둔 확고한 윤리관이 확립되어 분방을 억제하고, 인위를 중케 여기고, 사회의 혼란 보다는 절도를, 방종 보다는 절제를 앞세우고, 망동된 풍조 보다는 인습과 전통을 중히 여겨, 필경은 위계질서의 정신을 미덕의 요소로 삼았다.

그것은 공자의 학문은 계급을 엄격하게 하고, 질서를 존중하였으며 이것을 정책으로 시행한다면 통치자에게 모든 권한이 집약될 수 있어 군왕으로서는 적극 장려할 만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있어서 유학 이전의 사상체계는 선학(禪學)으로 유학은 다만 보조적인 의미밖에 없었던 것을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재빨리 유교의 명분주의를 내세워 새로운 통일 국가의 중앙집권적인 새 신분질서의 가장 좋은 예관(禮觀)으로 유착시켜, 유학을 인간형성의 기본학으로 수용하고, 타면으로는 치국평천하의 정치철학으로 통치에 원용하였다.

그리고 대동지세(大同之世)와 태평지치(治)로 정치윤리를 국민도덕의 근저로 하여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권선징악의 이상을 펴보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 각처의 문고(文庫)·번교(藩校)·사숙(私塾)·명륜당에서는 조선의 유서(儒書)가 국민교화의 교과서가 되고, 유학은 조선의 유서와 포로학자에 의해 당대를 풍미하던 사조로 만연되어 정신적 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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