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윤혜주

잘 여문 가을 무 하나를 샀다. 햇살 좋은 밭에서 엉거주춤 바지를 내리다, 가을볕에 들켜 볼기짝이라도 맞았는지 파르스름하니 곱게 물들었다. 채 썰어 살짝 절인 뒤 달구어진 냄비에 들기름과 다진 마늘을 넣고 자작하게 볶는다. 제 몸의 수분을 죄다 내놓고 가을 하늘을 닮은 듯, 맑고 투명해진 무에 양념으로 가을 마음 한 줌 더 보탠다. 달큼해진 무에 간을 한 후 다진 땡초와 깨소금을 솔솔 뿌려 내려놓는다.

자잘한 전복 몇 마리도 함께 사왔다. 맑은 눈빛을 하고 세상 구경하겠다고 시장 한복판에서 꼼지락거리던 놈들이다. 물 깊은 바다에도 가을의 마음은 고요히 물들었나 보다. 작고 연약한 듯하지만 통통한 살이 여간 야물지 않다. 얄팍하게 썰어 불인 찹쌀과 참기름에 달구어진 냄비에 던져 넣고 달달 볶는다. 고소한 냄새와 전복이 내놓은 짭조름한 바다향이 어우러져 집안 한가득 이다. 쌀뜨물을 부어 끓이다 찰박하니 죽이 어우러질 무렵, 불려 놓은 녹두 한 줌과 내장을 함께 갈아 한 소금 더 끓여 낸다. 노르스름한 빛깔이 이끄는 전복죽으로 숟가락이, 담백하면서 알싸한 가을 무채 볶음에 가족들의 수저가 바쁘다.

가족 중 백신 접종이 있는 전날이면 싱싱한 전복죽과 제철 채소로 상을 차렸다. 담백한 것들끼리 무슨 맛을 낼까 싶어도 내장의 진한 맛이 밴 전복죽과 달짝지근한 무채 볶음의 뒷맛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담백한 음식을 먹으니 몸도 상쾌해져 헛헛하던 배속보다 마음이 먼저 포만감에 젖는다. 혀끝에 와 닿은 맛의 잔상은 마침내 마음을 서서히 덥혀 더 먹고 싶은 맛으로 기억 창고에 저장되기에 이른다. 그 맛의 잔상으로 가족들은 마치 대단한 보양식을 먹은 것처럼 각인되어 마음이 먼저 몸을 다독이고, 몸은 건강으로 보답한다. 맛의 잔상이 던져주는 자잘한 시너지효과다.

혀끝 감각만이 잔상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일생 맞닥트려 느꼈던 삶의 잔상들은 나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흔적들의 축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든, 혀를 움직였던 그 강한 움직임은 오래 남아 애틋하거나, 아련하거나, 통증처럼 아리기도 한다. 더 먹고 싶은 맛의 판단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눈에서부터 시작된다. 동시에 뇌의 해마체에서는 논리적인 기억을, 변연계에서는 동일한 음식을 먹었던 당시의 감정을 소환해 기억 속의 맛과 현재의 맛을 동일시한다고 한다. 인생의 맛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진한 고통이었거나, 강렬한 기쁨이었거나, 처절한 아픔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 다난하거나 자잘하지 않고 특별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러나 사라진 것들에 남는 것은 모두 남은 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고도 없이 여위는 마음이 허무해져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 힘이 들 듯, 그 잔상 역시도 희미하게 퇴색되어 간다. 그러나 맛의 경계에서 희석되어 변질하거나 함부로 물리지는 않는다. 잔상은 흐릿해도 뭉근하게 타오르는 불처럼 오래도록 남아 내 뒤를 따를 뿐이다.
내 인생의 맛은 어떤 잔상을 남겼을까 톺아본다. 부모님의 조건 없는 온전한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내 유년의 맛은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웠지만, 가난한 농부의 딸로 자라 숙명처럼 짠맛부터 몸에 뱄는지도 모른다. 분주한 바람처럼 오감이 깨어나 열리던 시절이었으니 시고, 달고, 쓰고, 떫은맛들이 주는 호기심으로 내면은 충만했으리라.

인생의 오감이 어렴풋이나마 정립되던 십 대를 지나, 사랑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준비하는 이십 대는 세상을 가장 열렬히 느끼던 때였다. 경계를 두지 않는 바람처럼 오감의 세포는 활짝 열려 달콤한 이면엔 씁쓸한 맛이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삶에서 매운맛이,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다. 준비 없이 덜컥 부모가 되어 끌어안은 아이들에 혹독한 된맛도 보았고, 겁도 없이 받아들인 십일 남매의 맏며느리로 살면서 오지게 매운맛도 보았다. 그때까지도 잔상으로 남을만한 삶의 감칠맛은 보지 못했다. 수시로 방향을 바꿔가며 휘몰아치는 대가족이라는 소용돌이에서 입안은 쓰고 시며 텁텁했다. 그러다 가끔은 알싸하고도 시원한 맛도 있어 삶이 이완되기도 했다.

모든 것은 오래 쓰면 닳듯, 이제는 마음도 닿아 감각마저 명료하지 않다. 신이 인간에게 보장한, 인간의 평등성을 가장 잘 지켜주는 감각도 이렇듯 퇴색되어 무디어져 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인생의 한계 효용도 급속히 떨어지니 강렬하게 남아있던 맛의 잔상인들 자연의 섭리 앞에 온전할 수 있을까.

인생 가을은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다. 일 년의 맛은 가을에 준비하고 가을에서 맛을 낸다. 마음에도 수명이 있어, 상처를 주고받고 뒤통수를 된통 맞아 얼얼할 때마다 느낌도 그만큼 상실하게 된다. 불행을 겪고 나면 몸만 사려지는 게 아니라 생생하던 오감의 잔상도 사려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의 고비마다 온갖 간난신고를 겪은 뒤 느낀 여러 맛의 잔상들이 외려 두렵고 조심스럽지만, 처절한 통곡만큼이나 아릿하기도 하지만 작은 그리움의 차이로나마 기억하고 싶어지는 건 나이 탓일까.
이제는 인생의 늦가을에서 감칠맛과 슬픔의 참맛을 얘기해도 좋을 듯하다. 슬픔의 참맛도 내 마음을 강렬하게 끌어당겼던 그 감칠맛도 곧 무르익을 가을 속으로 들 것이다. 가을 맛의 잔상은 오래간다. 세상 물정 모르던 젊은 날 어찌 슬픔의 참맛을 실감 할 수 있었으며 맛깔스러움을 알았으랴. 정녕 이 가을은 슬픔의 참맛을 알고 더 먹고 싶은 감칠맛의 계절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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