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전투와 학도의용군

학도의용군이란?

‘학도의용군(학도병)’은 6·25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자진해 참전한 의용병을 일컫는다. 적게는 6∼7만 명, 많게는 30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참전했거나 지원 활동을 수행했다. 학도의용군은 6·25전쟁 발발 직후부터 1951년 4월까지 전·후방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공비소탕·치안유지·간호활동·선무공작 등에 참가해 군과 경찰 업무를 도왔다.

‘학도(學徒)’라는 단어는 전쟁발발 이전부터 활동해 오던 학도호국단에서 유래한 것이다.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국군의 전열이 무너지고,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무너지는 혼란한 상황에서 학도호국단 소속의 학생들은 자진해 국군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6월 29일 한강을 도하한 200여 명의 학생들은 수원에 집결해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시켰다. 여기에 참여한 구성원은 서울·경기 지구에서 모여든 전국학련·이북학련·반공학련 출신들과 학도호국단의 학생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6·25전쟁 중에 모습을 드러낸 여러 학도의용군 단체의 모체 역할을 했다.


▲군 트럭에 탑승해 이동 중인 학도병('나라를 지켜낸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가져옴)

전쟁 당시 학도병 대부분은 대한학도의용대를 거쳐 군에 입대했는데, 국군 10개 사단과 예하 부대에 배속돼 낙동강 교두보 전투에 참전했다. 1951년 2월 28일 학교복귀령으로 해산될 때까지 2만7천700명이 전투에 참가했다.

출 신 지

인 원

출 신 지

인 원

서 울 특 별 시

경 기 도

충 청 남 도

충 청 북 도

전 라 북 도

6,700명

23,500명

42,000명

21,500명

27,200명

전 라 남 도

경 상 남 도

경 상 북 도

강 원 도

제 주 도

23,800명

65,000명

56,000명

6,500명

3,000명

합 계

275,200명










대한학도의용대가 활동하고 있는 동안 전국학련 간부 출신들은 ‘전국학련구국대’를 조직해 활동했다. 대구에 내려온 전국학련 간부들은 경북학련을 주도하던 학생들과 재회해 조직을 재편했으며, 1950년 7월 17일에는 정식으로 전국학련구국대를 발족했다. 이철승을 총본부 위원장으로 한 전국학력구국대의 주요 활동 목표는 학도지원병 모집 및 후방선무공작, 대한학도의용대의 보완적 업무, 현역 입대 및 참전, 후방치안과 정보업무 수행, 그리고 수복지역의 선무공작 수행 등이었다.

이와 별도로 전국학련 간부 출신인 유구환 등은 내무부장관이었던 조병옥과 협의해 9월 4일 대구에서 정식으로 ‘대한학도경찰대’를 발족했다. 전국학련 간부 등 500여 명으로 구성된 학도경찰대는 1주간 특수훈련을 받고 후방치안을 담당할 요원으로 기용됐는데, 이들은 이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1950년 7월 26일 대구에서 자발적으로 결성, 수도사단 학도의용대를 거쳐 제3사단 학도의용대로 활동한 이들은 포항전투에서 활약했다.

이 외에도 육군본부와 국방부에서 주관해 운용한 독립 제1유격대대, 제1·2정훈대대 등도 전후방 각지에서 활동하고, 미군부대에 배속돼 활동했던 재일학도의용군(641명), 자신들의 고향에서 준동하던 공산 게릴라와 맞서 싸우기 위해 결성된 해군 묵호경비부 학도의용대, 학도치안대 등과 같은 자발적인 학도의용군 등도 있었다.

포항전투와 학도의용군

○포항전투

포항전투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포항을 두고 북한군과 1개월 이상 펼쳤던 공반전이다. 국군 제3사단은 1950년 8월 초까지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북한군을 저지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영덕과 강구일대에 있는 국군을 우회해 후방에 있는 흥해와 포항을 점령했다. 이에 국군은 고립돼 분투하다가 장사동에서 포위됐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키 위해 미 제8군사령부는 해상 철수를 명령하고, 국군 제3사단은 8월 16일 밤부터 아침까지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한편 점령된 포항은 국군의 민기식 부대에 의해 탈환돼 제3사단이 이를 인수했다. 그리고 9월 1일 포항 북쪽에 있는 북한군을 공격했다. 2일 포항 북쪽지역은 북한군의 9월공세로 혼전이 전개되고, 인접한 수도사단의 전선이 무너짐으로써 국군 제3사단은 방어선을 형산강 이남으로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공세도 한계점에 도달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했다. 결국 포항을 점령한 후 동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남진하려던 북한군의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포항전투에서 활약한 학도의용군

1950년 8월 초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에서 동해안을 따라 계속 남하했다. 그리고 8월 9일 강구를 점령했다. 이때 국군 제3사단의 후방지휘소는 포항여자중학교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에 수도사단에서 종군했던 학도병 71명이 8월 9일 저녁에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8월 11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의 1개 대대 이상의 병력과 제766부대의 일부 병력이 포항 시가에 들어와 국군 제3사단 후방지휘소를 공격했다. 이에 국군 제3사단은 소속 학도병 1개 중대에게 M1소총과 실탄 250여 발씩 지급하고 포항여자중학교(현재 포항여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라고 긴급 임무를 줬다. 하지만 이미 북한군 제12사단의 일부 병력은 전방뿐만 아니라 후방인 학교 건물 뒷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포항여자중학교를 지키던 71명의 학도의용군은 11시간 동안 네 번에 걸쳐 북한군의 파상공격을 처절하게 막아냈다. 또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 온 북한군을 향해 최후의 결전을 의미하는 백병전까지 전개했다. 즉 실탄이 부족한 상태에서 장갑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 맞서 학도의용군들은 최후의 일인이 쓰러질 때까지 싸웠던 것이다. 그 결과 김춘식 외 48명의 학도들은 못다 핀 젊은 한을 안고 산화했으며, 부상당한 13명은 북한군의 포로가 됐다. 결국 군국 제3사단 후방지휘소와 포항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포항여자중학교 뒷산에서 분전한 학도의용군 71명 중 우리지역의 전사자는 강기남, 김영환(대구상업), 서성룡(오상중), 김춘식(감포중), 이상헌(대구중) 등이다. 생존자는 김만규(대구성광중), 황기태(대구영신중), 정수득(대구영신중) 등이다. 이들의 이러한 결연한 행동은 우리 역사에서 외적의 침입으로 국난을 당했을 때마다 등장했던 의병들의 활동과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학도병 이우근의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중략)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허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중략)


▲학도병 이우근이 쓴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새겨진 비

※ 이 글은 최용성, 「나라를 지켜낸 낙동강방어선전투」, 경북정체성포럼, 2014; 양영조, 「대구·경북지역 학도의용군 선양방안」; 최용성, 「우리지역(대구·경북)의 호국영웅 선양방안」(󰡔경북의 6·25전쟁 호국영웅 선양방안 연구󰡕, 학술회의 자료집, 2015)에서 가져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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