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境의 아침

이근식

가을볕에 과일이 익어서

꼭지가 물러내린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질서

생명이 무시로 무너져내리는

이승에서 떠난다는 것은

외로운 축복 같은 것이다

어제는 처마 밑 제비집에서

새끼가 부화했고

오늘 아침엔

친구의 부음이 날아왔다

한 생명이 태어나고 무너져 내리는 아침

그 생명의 무게만큼

지구의 한 모퉁이가 잠시 흔들렸다

서로 맺은 인연을 맺고 푸는 길은

자연의 냉철한 의지 속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기가 잠시 출렁일 뿐이다.

-이근식 시집 『여든의 아침비』(마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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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도시 서라벌 경주가 요즘 지진 때문에 시끌벅적하다. 목월(木月) 박영종과 청마(淸馬) 유치환의 시적 자장(磁場)이 강하게 남아있는 도시 경주, 이곳에 미수(米壽)를 넘긴 나이지만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근식 시인이 있다. 1972년 『현대시학』에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통해 등단하고, 젊은 시절 유치환 시인을 가까이서 모시며 시작활동을 해온 이근식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두 선배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인이다. 위에 인용한 시는 지난 해 초봄 여든여덟 미수의 나이에 펴낸 시집 『여든의 아침비』(마을,2015)에서 가려 뽑은 작품이다. 놀랍지 않은가. 노장(老壯) 사상에 바탕을 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바람’이나 ‘물’의 순행과 그 운동”(김종섭)이라 명명(命名)되고 있는 이근식 시인의 시세계에 잘 합치되는 작품이다. 시집 속 또 다른 작품 「목련나무에는 목련꽃이 피고」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치의 침범도 없이 살아가는/자연의 아름다운 질서” 우주 생명의 그 “정연한 중정(中正)”을 흐르는 바람과 물의 필체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위 시에서 진술하고 있는 생의 마감을 “외로운 축복”으로 노래하는 혜안(慧眼)은 어느 때 가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목월 생가 근처 마을에 살고 계시는 선생님 댁에 가을이 깊으면 한 번 찾아가 뵈어야 겠다.

-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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