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외길을 걸어온 古方 정경수 서예가

고방(古方) 정경수 서예가(63)를 12일 용흥동 한라코아상가 고방서예관에서 직접 만나 서예가로서 걸어온 한 평생에 대해 듣는 행운을 가졌다.그는 영일 정씨로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손이다. 고향과 외갓집이 모두 오천인 그는 외증조부께서 서당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외손자로서 자연스럽게 유년시절을 서당에서 뛰어놀면서 천자문을 익혔던 것이 서예가로서 길을 가게 한 인연 같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정경수 씨가 본격적인 서예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8년부터다. 포스코에 근무하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조직생활이 체질에 맡지 않아 사직을 하고, 30대 초반인 86년도에 서예공부를 시작했다. 미술대전(국전)에 몇 번 낙선을 하고나서 서울서 예술의전당 서예지도자과정 1년을 공부를 했다. 이때 전국의 서예가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고방 정경수 서예가는 국내 대학에서 서예과가 없을 때 여초 김응현 선생 문하에 입문 후 서예대학 및 대학원과정을 공부를 했다. 당시 대만글씨로 쓴 원서로 이론을 접하면서 서예에 눈을 떴다. 이때 서예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의 인사동 뒷골목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서예가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고방은 자식과 손자 대에는 후학들이 전국 어디 가더라도 포항이 서예도시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도록 터라도 닦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젊은 친구들을 모아 25년 전 서예가협회를 만들고 포항서예연구회를 28년 전에 만들었다.

당시 남파대사비문을 탁본하는 등 25년간 젊은 혈기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97년 전국 중소도시에서 최초로 포항서예가협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에 석광 오일수 씨가 맡았고, 초대부회장에 이어 협회장 3회를 역임하면서 지금은 상임고문으로 있다. 서예가협회를 구성한 후 2년이 지나 포항서예연합전을 선배들과 같이했으며 허주, 목천 등의 선배를 초대하고 대백갤러리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정경수 서예가는 고방서예관을 올해로 32년째 운영하면서 제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동안 예술가로서 외길 인생을 살면서 절실하게 느꼈던 것은 지방에서 전업으로 서예가 생활을 하기에는 환경적 여건이 안동·상주보다 인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는 후학들을 양성해 영일서단전 16회를 개최해 작품발표를 했으며, 단오를 전후해서 팔덕선전(八德扇展)을 2회째 개최했다. 80년대는 서예를 배우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90년 후반 IMF를 맞자 서예를 배우려는 제자들이 모두 끊겼다. 예능을 등한시하고 입시위주의 교육부 정책으로 인해 서예서실 운영이 어려웠다. 지금은 성인위주로 10년 넘게 지도하고 있다. 다행히 정년퇴직을 하신 분들이 있어서 조금은 낫다고 한다. 서예가 좋아서 선택한 20대에서 30대에 본격적으로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서예가의 길을 가고 있지만 처자식이 많이 힘들어했다. 보통 가정에서 시키는 흔한 과외나 학원도 한 번도 못 보냈다고 했다.

서예가로서 보람 있는 일은 낯선 사람을 만나 인사하는 사람 중에 제자들이 성인이 돼서 “선생님 덕분에 좋은 직장에서 잘하고 있다는 인사를 들을 때나 후배작가들이 전시장에서 만나서 초대작가가 되었다는 등 인사를 들을 때는 가장 고맙다”며 각계각층에서 열심히 일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흐뭇하다고 말했다.

평소 그는 후한서에 나오는 有志者事竟成(유지자사경성)에서 가져온 有志竟成(유지경성), ‘의지가 있다면 마침내 이룬다’는 말을 새기며 산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莫謂當年學日多 無情歲月苦流波(막일당년학일다 무정세월고류파) ‘지금 배울 날이 많다고 이르지 말라. 무정한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사람이 할 일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 事不三思終後悔人能百忍自無優(사불삼사종후회 인능백인자무우) '사람이 능히 백번 참으면 스스로 근심이 없다' 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정경수 서예가는 “최근 포항의 문화계를 보면 걱정이 된다. 선출직 시장과 시의원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너무 치중하는 것 같다. 앞을 멀리 내다보고 문화기획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포항은 타도시보다 인구가 많아 정력이 있고, 훌륭한 사람이 많다. 똑같은 돈을 투자해 조형물, 표지석 등을 만들어서 무가치하게 쓴다. 일례로 ‘학도병의 편지’를 인터넷에서 뽑아 판에 박은 글씨로 새기지 말고, 공모를 해서 뜻있는 분들이 참여해서 좋은 작품(글씨)을 선정해서 한다면, 비록 작은 돌 하나지만 예술작품이 된다”면서 “호남지방에는 그렇게 한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예술의 옷을 입혀 작품을 만들어야 볼거리가 있는 찾고 싶은 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

덧붙여 “오석에 글씨를 새겨서 넣으면 된다. 교각 글씨 등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가치가 있다”고 했다.

“올해는 닭띠 해다. 수탉처럼 모양새도 좋고 암탉들이 알을 많이 낳듯이 국운이 왕성하고 포항시에 있는 기업들이 잘됐으면 좋겠다”며 “문화예술계도 좋은 작품 많이 만들고 융성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공부해왔던 것을 집대성하고 싶다.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서예가로서 수필집과 시문집을 후학들을 위해 남기고 싶다”고 소망을 피력했다.

그는 전국 중소도시 최초로 포항서예가협회창립해 초대부회장 및 협회장 3회 역임후 현재까지 충효학생서예대회를 25년간 개최했고 포항시서예대전을 24년간 열어 지역의 서예저변을 확대하고 전통문화발전에 기여해왔다.

또한 시민무료가훈(사훈)좌우명 써주기 행사를 1997년~2016년(20년)동안 포항시,읍면동주관행사(국가해맞이축전, 대통령고향마을, 영일대해수욕장, 포항운하축제, 포항시민체육대회, 부조장터축제, 운제산문화제 등)와 해병1사단부대방문 가훈·좌우명써주기, 대경일보 주관 내연산문화축제 등 행사에 50여 회 참가해 단란 가정과 화목직장을 위한 휘호(揮毫)하였다.

이외에도 경북동부 서예관련모임 영일서단(迎日書壇)의 대표(이사장)로 1987년부터 현재까지 30회 작품발표전을 주관하고 개최해 서예 및 전통문화발전에 盡力(진력)하고 있다. 그리고 영일서단 묵향전(墨香展) 16회, 단오부채 팔덕선전(八德扇展) 2회, 영일서단 초대작가전 3회, 영일만 친구전 1회, 수강생 작품전(포항시평생학습원 7회, 연일복지회관 3회, 기타1회) 등 지역서예 발전을 위해 열정을 태우고 있다.

정경수 서예가는 1986년부터 전업작가로 개원한 고방서예관에서 현재까지 2000여 명의 同學(동학)들과 함께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서예 외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 그의 작품이 더욱 깊어져 포항지역에 서예의 터를 잡는 대가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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