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통신] (60) 영국 왕실과 독일 하노버 관계 및 풍경
박선영 세종대 교수
2024-06-06 권수진 기자
베스트팔렌 조약은 역사박물관을 통해 자세히 검토하려고 하였으나 폐관하는 날이어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노버를 상징하는 도시 삼림은 워낙 커서 다 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맛이라도 보아야 하기 때문에 굳이 찾아가서 도심 속의 여유를 잠시 즐겨보기도 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중세 독일의 명문가 벨프(Welfen) 가문이 권력의 변화로 부침을 겪다가 하노버를 수도로 하면서 하노버 가문으로 명명하였다. 1714년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앤 여왕이 죽게 되자 촌수로 6촌 격인 하노버 제후 게오르그 1세가 영국왕위에 오르면서 조지 1세로 영국을 통치하는 가문이 되었다. 영어도 잘 모르는 독일인 조지 1세는 로버트 월폴을 초대 총리로 삼아 21년간 국정을 책임졌던 역사성으로 영국의 입헌군주제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 초대 총리이자 역대 최장 총리를 맡았던 로버트 월폴은 예술 작품 수집이 취미였는데, 그가 생전에 모았던 작품은 그의 손자가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에게 팔아서 현재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관람할 때는 그곳에 전시된 작품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었는지 몰랐다. 그곳에 세계적인 작품이 소장될 수 있는 연유를 이해하니 거미줄처럼 연결된 유럽의 복잡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독일 하노버 가문 출신으로 영국왕 조지 1세가 되었던 1714년부터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들어서기까지 영국과 하노버 가문은 ‘동군연합’을 형성하여 영국을 유럽 최강국으로 만드는데 역할 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후 하노버가 왕국으로 승격했지만 크게 발전을 이루지 못하다가 강국 프로이센에 멸망했다. 그러나 영국왕 조지 2세가 괴팅겐 대학과 학술원을 세운 것은 하노버 가문의 중요한 문화유산이자 양국의 학문 및 문화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1차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싸웠던 영국, 유럽연합에서 탈퇴하여 홀로 나와 있는 영국과 유럽연합 안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독일은 가까운 듯 먼 듯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향후 새로운 유대관계를 모색할 때 하노버 왕조의 역사가 분명 다시 소환될 것으로 보인다.
하노버는 처음으로 레코드가 발명된 곳이자 최초로 카세트 음악과 CD를 만든 곳이어서 유네스코 음악도시로 명명되고 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스프렝겔 미술관(Sprengel Museum)으로 현대미술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었던 점이다. 특히 스페인의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독일의 베크만(Max Beckmann, 1884-1950) 작품을 비교 검토할 수 있게 전시한 것은 압권이었다.
이들은 동시대의 화가이자 모더니즘의 핵심인물로 20세기 전반 구상회화를 정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한 번도 두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서 전시해 본 적이 없지만 스프렝겔 미술관에서 기획전을 만들어 이들을 만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사후에 미술관에서 서로 마주 보며 작품이 전시되어 관객들을 통해 양자가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베크만도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당대 워낙 피카소가 유명해서 그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미술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던 베크만은 피카소의 명성에 눌렸던 측면은 있지만 묘하게 2명의 작품은 같은 듯 다른 듯하면서 자신만의 색채가 있었다. 동시대 서로 다른 국가에서 활동했던 작가를 비교한 것, 비슷한 주제의 그림을 배치하여 비교가 용이한 점 등 전시회를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미술관을 나서는데 터키 출신 직원이 한국어를 하면서 한국이 너무 좋아서 내년에 한국에 가볼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금만 걸어가면 유명한 니키(Niki de Saint Phalle, 1966-1990)의 작품이 있으니 그 작품을 보라고 알려 주었다. 워낙 화려한 색상을 조화롭게 만든 설치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라서 작품들 때문에 도시의 분위기가 한결 밝아 보였다.
이번 하노버 도시 탐방으로 그동안 쉽게 간과하는 독일 하노버 왕조와 영국 왕실의 연결성을 이해한 것은 큰 소득이다. 또한 뒤늦게 국가 통합을 한 독일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 빠르게 각종 소도시까지 성장시킨 동력도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