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버리 60대 유럽 11개국 정복기] 죽기 전에 나 홀로 유럽 배낭여행 (48)소녀의 눈물은 차갑다

강재승 여행가

2024-08-29     권수진 기자
▲ 베를린 미테구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일제 강점기인 1944년 5월 31일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 열세 살 김성주는 일본인 담임선생의 꾐에 빠져 일본으로 건너간다. 아버지는 강제징용에 끌려가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졸지에 가장이 된 그녀는 중학교도 갈 수 있게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어린 동생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성주는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제작소에 동원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입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고 식사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다. 막내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갈수 없었다. 얼마 후 바로 아래 여동생이 언니를 찾을 수 있게 해준다는 담임선생의 말에 속아 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전혀 다른 곳으로 보내져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성주는 어느 날 장갑도 착용하지 못한 채 항공기 외피를 절단하다가 실수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충격과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고 울고 있는데 일본인 감독관이 잘린 손가락을 공중으로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손가락이 굵다.”고 놀려댔다. 그해 12월에는 지진으로 공장건물이 붕괴돼 크게 다치기도 했다.
1945년 10월말 성주는 17개월 만에 귀국했으나 아무런 배상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으로부터 “위안부 출신”이라는 말과 함께 수시로 폭행을 당해야 했다. 이웃사람들도 그녀를 일본군 위안부 출신이라며 수군거렸다. 노인정에서도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와 멸시를 당해야 했다.
2000년대 초 김성주 할머니는 일본의 강제징용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법정싸움을 시작해 2018년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승소판결을 받았다. 당시 87세의 김 할머니는 공개석상에서 “자식들은 나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손가락질 받는다.”며 끝나지 않는 고통을 호소했다.
김 할머니를 비롯한 생존 피해자들은 지속적으로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은 아직도 배상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가난한 집안의 열일곱 살 순이는 1940년 일본군에 의해 중국의 한 위안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순이는 끔찍한 성적 학대와 폭력에 시달렸다. 음식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고 비위생적인 상태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일본군 병사들을 강제로 상대해야 했다. 견디다 못해 도망치다 잡혀 무차별 구타를 당하기도 일쑤였다. 극도의 공포와 충격 속에서 어린 순이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한 장사꾼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탈출한 그녀는 그 장사꾼과 만주와 중국을 떠돌며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귀국길에서 그녀는 딸을 콜레라로 잃어버렸으며 한국전쟁 발발 후 남편과 아들을 몇 년 사이 사고로 잃어버려야 했다.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할 가혹한 운명의 무게에 그녀의 삶은 무너져갔다. 그녀는 성적 폭력과 학대에 대한 기억에 시달리며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삶을 살아야 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분위기와 함께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높아졌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67세의 김학순 할머니는 인생에서 가장 큰 결심을 하게 된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위안부 피해자 공개증인으로 나섰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가 강제적으로 성적 착취를 당했다."고 밝히며,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당한 것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위안부’ 자체가 없었다고 발뺌하는 것이 너무 기가 막혀 ‘내가 증거다’라고 증언하게 됐다.”
그녀의 공개증언은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자신들의 피해사실을 증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239명의 피해자가 추가로 나타났다.
한국의 시민단체, 인권단체들과 국제적인 인권옹호단체들은 이날을 계기로 매년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로 지정하고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2024년 8월 기준 1,629차례에 걸쳐 열린 수요집회가 대표적인 활동이다. 일본은 여전히 “그런 적 없다.”며 잡아떼고 있다. 일본정부의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하고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7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성주 할머니와 같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60만~80만 명, 김학순 할머니와 같은 위안부 피해자들은 5만~20만 명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생존자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침 8시 18분, 플릭스버스를 타고 프라하를 출발한 지 5시간 만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타고 미테구로 향한 이유는 이곳에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 당시의 고통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적 인물들, 열세 살의 성주와 열일곱 살의 학순이다. 2011년, 서울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그 이후 미국과 캐나다에 이어 2020년 독일 베를린에도 세워지게 되었다.
지하철역에서 5분 쯤 가자 2020년 9월 베를린에 있는 한인 및 독일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의 주도로 건립한 평화의 소녀상이 미테구의 작은 공원 앞에 세워져 있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단발머리의 작은 소녀가 맨발로 의자에 앉아 주먹 쥔 손을 무릎에 올린 채 하염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왼쪽 어깨엔 비둘기까지 올려놓았다.
잠시 소녀상 옆 빈 의자에 앉아서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7월의 뜨거운 햇빛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먹먹함과 답답함이 밀려왔다. 이 하염없는 기다림에도 가해자인 일본은 공식적,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쩌다 마지못해 유감표명을 해놓고는 돌아서서 신사참배에 역사왜곡에 책임회피를 일삼는 그들을 바라보는 이 소녀상은 단순히 위안부 피해자만 상징하지 않는다. 김학순 할머니와 같은 위안부 피해자는 물론 김성주 할머니와 같은 강제징용 피해자, 더 나아가 36년간 온갖 핍박을 받은 우리 민족의 상징이다. 단 한 번도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으면서 군함도에 이어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한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분노와 슬픔을 담고 있는 상징물이다. 소녀상이 작은 주먹을 쥐고 있는 이유이다.
마을 사람들이 소녀상 근처에 설치된 음수대에서 물을 길러간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배낭에서 수건을 꺼내 적신 후 소녀상의 얼굴을 닦았다. 이 뜨거운 7월의 태양 아래 나무그늘마저 비켜간 오후 2시에도 소녀는 오로지 홀로 모든 것을 견뎌내고 있다. 누구든지 소녀와 함께 해달라는 의미로 조성해둔 빈 의자가 쓸쓸하다. 소녀상은 생각보다 먼지가 적었다. 코리아협의회의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다. 두 여성이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소녀상 옆 비문을 읽어본다. 일제의 만행과 소녀상의 의미가 새겨진 비문을 읽는 동안 밝은 미소를 띠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소녀상 건립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소녀상 제막식 9일 후 미테구청은 비문의 내용을 문제 삼아 철거를 요구했다. 일본정부의 항의와 방해공작에 미테구청이 흔들린 것이다. 코리아협의회와 정의연 등 시민단체들은 철거명령집행정지가처분신청을 하는 한편 유엔에 철거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독일 현지에서는 소녀상 철거반대청원운동이 시작되었다. 시민단체와 주민들도 철거반대운동에 동참했다. 마침내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을 뚫고 국제적인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낸 ‘항일연대세력’의 승리로 지금까지 소녀상은 베를린에 남게 되었다. 당초 1년 한시적인 설치조건이었으나 소녀상의 역사적 의미가 알려지자 지역주민들과 국제사회의 지지가 이어지면서 설치 기간이 연장된 것이다. 향후 영구존치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은 이곳 베를린에서까지 역사적 사실을 은폐와 왜곡, 날조를 일삼고 있어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오히려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더 사과해야 하느냐?”라는 반응마저 보인다. 드물게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피해자가 이제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사과하는 게 옳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발언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그가 만약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정한 사과를 했는지를 먼저 되돌아보아야 한다.”라는 발언을 했더라면 참다운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하루키도 딱 거기까지였다. 일본인의 한계인지 하루키 개인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한계가 아님은 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