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필담] 대한민국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정연태 한동대학교 지역혁신원 자문위원
2025-04-10 대경일보
코로나로 국가적 위기 상황에 모이지 말라는 정부 방침을 어긴 것도 기독교를 참칭한 집단들이었다. 최근 정치 혼란기에 기독교를 표방한 유사 정당이 집회를 하고 사회자가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일들이 있다. 집회 참가자 중에 과연 진실한 기독교도들이 얼마나 있는지 세어볼 수는 없다. 물론 ‘진실한’이란 수식어는 예배당에 모인 방청객들에게도 적용하기 어렵다.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서거나 신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이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인생 최초의 기억이 어머니 등에 업혀 새벽기도를 다니던 장면이다.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원천적으로(다행스럽게도) 거세되어 태생적 기독교인으로 살아오고 있다. 살면서 정말 부끄러운 일은 ‘당신도 교회를 다녔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이다. 이는 내가 교인이라는 표시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인데, 숟가락을 들기 전에 기도를 거른 적은 없다. 그것만으로 교인임을 감지하기 어려웠을 관계가 존재한다.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관찰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이라도 대화를 하거나 알고 지내는 동안에 크리스찬이라는 표시를 내지 않았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경건하거나 거룩하거나 정결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가끔 교회에 나가라고 권유를 하는 일들에 소홀했다는 증거다. 당혹스러운 것은 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 누군가 먼저 ‘혹시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어보는 경우다. 인격적으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 붙는 일종의 찬사다. 모름지기 교인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보편적 척도이기도 하다. 그런 분들에게는 교인으로서 머리가 숙여지고, 저렇게 살아야지 다짐하게 된다.
애국가를 처음 배울 때부터 필자는 가사를 바꿔 불렀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기도하는 심정으로. 천주교에서는 원래 하느님이라 부르므로 바꿀 필요 없이 애국과 신앙을 연계하여 승수효과를 올렸다. 최근 혼란한 정국에서 기독교(호칭에 대해 명백한 반론이 있지만)가 ‘모종의’ 역할을 함으로써 기독교계에서나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야 하는 세력들의 애환이 엿보인다. 인정 받지 못하는 이들이 인정을 받으려는 열망은 처연하고 애달픈 일이다. 그렇다고 불법이나 폭력을 저지르고 선을 넘어서까지 지지를 얻을 수는 없다.
신의 존재를 인간이 ‘알 수 있다, 없다’ 논쟁으로 유명한 칼 바르트의 ‘로마서’를 빌렸다. 에밀 브루너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신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칼 바르트는 신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인간이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고 반박했다. 문화예술의 역사를 토론하면서 학생들과 문명 발달과 종교에 대한 문제를 짚어 보려다 한동대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천이백 페이지 책을 알타미라 동굴을 탐험하듯 펼쳐 보던 중 최근 우리나라의 현상을 예견했나 싶은 부분이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역사는 어떤 한 사람의 정신과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자칭 우월하다고 떠들어대는 놀이이며, 공의와 자유의 이데올로기로 가장한 생존 투쟁이며, 과거 인간의 의와 새로운 인간의 의가 서로 장엄함과 무상함을 겨루면서 치솟아 오르거나 가라앉는 것이다. 시간에 종속된 사물의 바다 전체보다 한 방울의 영원이 더 무겁다. 신의 기준으로 보면 인간의 우월함은 그 높이와 엄중함과 영향력을 상실한다’ (칼 바르트, 로마서, 율법)
윤석열 대통령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윤석열 대통령도 믿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손바닥에 ‘왕’을 새겨서 당선된 끝이 감옥에서 성경을 읽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태도가 어떠할 수 있는지, 얼마나 진지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변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헌법이라는 준거로 들여다 본 대한민국의 법 앞에 평등한 ‘인간’의 모습은 문형배씨가 낭독한 문장으로 정당하게 소화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전원 일치가 보편적 가치의 존재를 확증하는 기준인 지도 이견은 있다.
이재명씨의 정신과 능력이 윤석열씨 보다 우월하다고 떠드는 사람이 많다. 왕이 될 것인가 황제가 될 것인가 레벨의 차이일 뿐 대통령이라는 명찰을 달 가능성은 높다. 최근 몇 번의 사례를 보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유력한 후보일 때가 가장 힘이 실린다. 그러다가 취임과 동시에 힘을 잃는 시간이 시작된다.
영원한 신 앞에서 이슬 같은 인생의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부질 없는 것에 영혼을 팔지 않을 ‘사람 같은’ 사람을 뽑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