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인천상륙작전의 롤모델이 된 한국전 최초의 포항상륙작전(작전명: 블루하트)
서일주 미국맥아더자유평화재단 포항본부 회장
2025-09-15 대경일보
| ▲ 현재의 송도와 동빈내항. 영일대해수욕장의 항공사진. 1- 영일대앞 해상에서 LST함정에서 상륙단정(LCM)에 옮겨 탄 미군들을 실어나르는 모습. 1-1 영일만 해상에 상륙작전을 수행하기위한 함정들이 집결하는 모습의 항공사진(뒷편 영일대해수욕장이 보인다) 1-2 영일만 앞바다에서 LST함정에서 미군들이 상륙단정(LCM)으로 옮겨 타는 모습. 1-3 학산방파제앞 정박한 LST함정 2대와 부근에 집결하는 상륙단정(LCM)의 모습을 촬영한 당시의 항공사진 필름. 2- 영일만 해상 LST함전에서 상륙단정(LCM)으로 옮겨탄 미군들이 학산방파제 (울릉도여객선터미널)로 상륙하는 모습. 뒤편으로 영일대해수욕장(구 북부해수욕장)이 보이며, 좌측 첫번째 야산이 현재 우방비취APT, 두번째 야산이 청운우방APT, 세번째 야산이 우방신천지APT이며, 산정상에 송도로 이전하기 전의 측우소, 우측에 작은건물이 두호동롯데A 자리의 옛 포항수산고등학교의 모습도 보인다. 3- 동빈내항으로 상륙하는 미군(현 경북광유 앞 부둣가) 4- 포항에 상륙한 LST 2척이 학산방파제에 정박해 있는 모습(현재의 울릉도여객선터미널 앞) 5- 상륙한 미군들이 집결하는 모습(좌측: 구 대한통운자리(해양수산청), 우측:시멘쓰클럽 건물(현재 포항세관) 6- 영동지역 이동을 위해 포항역으로 이동하며 모갈산(수도산)앞 서산터널부근을 지나가고있는 미 제1기병사단 병력. 7- 1950년 7월22일 제2차 상륙군들이 송도해수욕장으로 수륙양용차량으로 들어오는 모습, 뒤편 해안가의 송도솔숲이 보인다. 김진호 사진작가 제공 |
| ▲ 지금은 포항의 대표적 관광특구로 변한 영일대해수욕장의 포항상륙작전의 역사 현장에서의 서일주(sif054@naver.com) 미국맥아더자유평화재단 포항본부 회장 |
한국전의 전세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은 전 국민이 잘 알고 있으나 이 작전의 롤모델이 된 한국전 최초의 상륙작전인 포항상륙작전은 그동안 포항시민들도 잘 모르는 묻혀진 전쟁사였다.
필자는 지난 대경일보 기고(9월10일자 19면)에서 포항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도시 정체성회복과 역사의 스토리텔링으로 호국 안보 자유 평화도시 브랜드를 만들어 경제·문화사업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여러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포항상륙작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상황을 알리고자 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반도의 평화를 송두리째 바꿔 놓은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이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불과 다섯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개성이 함락되었고, 3일 만에 서울까지 점령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북한군의 남침이 현실화되자, 미국 행정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5일 오후 2시(뉴욕 시간) 북한의 행동을 ‘평화의 파괴’이자 ‘침략행위’라고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에 이어 6월27일엔 UN 회원국들이 한국에 가능한 모든 원조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해·공군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해 북한군을 격퇴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그러나 6월 29일,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전선을 직접 시찰한 뒤 지상군 투입의 긴급함을 보고했고, 결국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지상군 투입을 승인하며 대응을 확대했다. 미 제24사단 35연대는 일본 기지에서 상륙훈련에 돌입했고, 일본 기지에서 공수된 미 제24사단 병력은 7월 5일 700명 규모의 병력수준이었으며, 맥아더 원수는 "당면 긴급문제는 한반도 전 지역에서 남진하고 있는 북한 지상군의 진로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부산항은 수많은 함선으로 포화 상태였기에, 7월 6일 맥아더 장군은 도일 제독에게 지시해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하게 했으며, 약 3일간의 회의 끝에 도일 제독은 부산에서 북쪽으로 약 65마일 떨어진 포항을 전략적 상륙지로 결정했다.
그리고 7월7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UN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UN군이 구성되고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타이,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 육해공군의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으며, 단일 지휘체계 하에서 유엔군이 전쟁을 수행하게 됐다.
당시 포항은 영일비행장(K-3)과 항구, 철도 연결망이 수월한 조건을 갖춰 상륙지로 최적이라고 판단 받았다. 7월11일 제1상륙전대와 제1기병사단 참모들은 포항으로 이동해 철저한 정찰과 정보 수집을 시작했고, 7월12일에는 '블루하트' 작전 명령이 하달됐다.
7월15일, 마지막 선발대가 포항에 도착하면서 무저항 행정상륙에 대한 확신이 커졌고, 17일에는 4일간의 치밀한 소해작전으로 포항 해역의 기뢰가 완전히 제거돼 안전이 확보됐다.
드디어 7월18일 새벽, 상륙함대가 영일만에 도착했고 5시58분 도일 제독의 명령으로 미 제1기병사단 병력 3000명과 차량 2000대가 신속하게 양륙을 시작했으며, 모든 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완료됐고,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환영 속에 상륙군은 포항역에서 곧바로 중부전선으로 이동해 북한군 저지 임무에 돌입했다.
제7기병연대 일부는 포항에 잔류하며 인근 영덕 방면의 해안 방어를 지원했고, 7월20일에는 제8기병연대가 영동 지역에 도착해 제24사단과 방어 임무를 교대하며 본격적인 중부전선 투입이 이뤄졌다. 7월21일 태풍 '그레이스'가 영일만을 강타했으나, 미군은 신속하게 대응해 7월22일에는 제2차 상륙부대까지 포항송도에 상륙하며 작전을 성공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후 상륙군은 김천 방면으로 이동해 중부전선 방어선을 견고히 구축했고, 9월14일 인천상륙작전의 교란작전인 장사상륙작전이 이어지며 본격적인 반격 국면에 돌입했다. 그리고 9월15일 새벽, 인천 팔미도 등대에 불이 밝혀지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한국전쟁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포항상륙작전은 영일비행장(k-3)이 북한군에게 함락됐으면 할 수 없었던 한국전쟁 중 가장 중요한 첫 대규모 상륙작전으로서 낙동강방어선과 함께 형산강방어선인 워커라인이 무너지면 부산이 위험해진다는 판단 하에 전세 반전을 위해 신속하고 치밀하게 이뤄진 작전이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포항상륙작전은 이후 인천상륙작전의 밑거름이 됐으며, 오늘날 포항이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 된 기초였음을 깊이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제1기병사단의 포항상륙작전이 없었다면 부산주변을 북한군에게 넘겨주는 위험을 초래하였을 것이다" - 조이(C. Tumer Joy)제독
"도시는 역사를 기억하고 스토리텔링으로 가치를 올려야 할 것이다" 포항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전초이자 롤모델로서 한국전쟁의 전세를 반전시키는 중대한 계기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묻혀진 역사로 남아 있던 이 상륙작전은 이제 포항 의 정체성을 밝히고 도시 브랜드로 승화시켜야 할 새로운 역사 자산이다.
오늘날 우리는 형산강 워커라인을 지켜내며 기적적으로 만들어낸 포항상륙작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전 이후 포항의 도시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포항은 산업의 쌀인 제철산업으로 국가 경제를 일으켰고, 전국 최초의 새마을운동 발상지이자, 전후 폐허가 된 국토에 가장 먼저 사방사업을 실시한 도시이다. 또한 한국 최초의 해외 파병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의 요람으로서, 국가 존립과 보국의 이념을 실천하며, 국가 부흥의 초석을 다져왔다.
이러한 역사적 자산을 토대로 포항은 호국 안보와 자유·평화를 상징하는 도시 이미지를 확립해야 한다. 아울러 포항상륙작전의 역사적 현장을 국제적 자유·평화 문화공간으로 보존하고, 이를 활용한 스토리텔링과 경제 문화 사업으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또 시민 모두가 '최초의 도시'라는 자긍심을 공유하며, 포항이 살아 있는 역사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포항시는 이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리고 재조명해 포항상륙작전을 중심으로 한 호국안보 자유 평화도시 브랜드를 구축, 도시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함과 동시에 지역 경제와 문화발전의 견인차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역사적 책임이자 미래를 향한 희망의 씨앗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숭고한 희생 위에서 얻어진 것을 우리는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