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쟁의 천막에서 APEC까지, 대구의료인들은 쉬지 않고 걷는다

민복기 대구광역시의사회 회장

2025-11-17     대경일보
▲ 민복기 대구시의사회 회장. 김민규 기자?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1953년 겨울, 대구역 앞에는 몸과 마음이 다친 이들이 모여들었다. 의사들은 천막을 치고 손으로는 지혈을 하며 밤을 넘겼다. 그 천막이 훗날 병원이 되었고 의료는 다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되었다. 대구 의료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세계무대로 향한 대구 의료의 품격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전환점에 서 있다. 무기가 아니라 기술이 바뀌었을 뿐, 그 중심에는 여전히 ‘사람’이 있다. 지난 10월 경주에서 열린 APEC CEO 써밋은 세계 21개국 정상과 기업 리더들이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 무대였다.

그곳에서 대구시의사회는 K-뷰티·K-메디컬 서비스존을 운영하며 한국 의료의 정밀함과 따뜻함을 보여줬다. 외국인들은 단순한 진료 체험이 아니라 ‘의료의 품격’을 느꼈고, 그것이 곧 ‘한국의 품격’으로 남았다.

의료의 위상은 기술이 아니라 신뢰에서 비롯된다. 정부와 의료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립이 아닌 협력으로, 정책은 현장의 목소리 위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정부는 의료인을 파트너로 신뢰하고, 의료계는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책임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함께 설 때 비로소 의료의 공공성이 살아난다.

대구시의사회 창립 80주년이 다가온다. 1947년 몇 명의 의사들이 “사람을 지키는 일이 곧 도시를 지키는 일”이라며 손을 맞잡았다. 그들의 신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세기의 역병이라고 불렸던 ‘코로나19’ 감염병의 공포 속에서도, 대구의 의료인들은 시민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꾸준함이 대구 의료의 품격이고, 그 품격이 바로 신뢰다.

◇사람의 체온으로 이어지는 미래
대구는 AI와 바이오의 중심 도시로 다시 도약하고 있다. 첨단의료복합단지와 대학, 병원, 기업이 협력하며 새로운 의료의 길을 열고 있다. ‘AI 기반 필수의료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해 진료 접근성을 높이고, 중증·응급의료 체계를 강화하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기술이 의료의 새로운 날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은 언제나 수단이다. 의료의 본질은 사람에게 있다.

대구시의사회는 의사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다. 장애인돕기 자선음악회, 무료진료, 청소년 건강교육, 해외 의료봉사,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진 뒤에도 의사들의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의료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을 지키는 일이다.

APEC 이후,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의료의 품격은 어디서 오는가’ 정답은 오래전부터 같았다. 사람을 살리고 신뢰를 쌓는 일. 그 믿음이 대구시의사회를 만들었고, 대구 의료를 지금까지 이끌어왔다.

조선시대 ‘혜민서’는 병든 백성을 돌보고 가난한 이웃을 살피던 나라의 의원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 정신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의 대구 의사들도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낫게 하는 일. 그것이 의료의 품격이고, 곧 도시의 품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