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은 사람] 기다림이 만든 '한 잔의 결' 은자골 탁배기 임주원 대표

2025-11-19     정철규 기자
▲ 임주원 대표
상주 은척면의 깊은 골짜기, ‘은자골’. 오래전 은자가 숨어 지냈다 전해지는 이곳은 지금도 고즈넉한 산자락과 함께 오래된 공기를 품고 있다. 사람의 삶과 함께 이어져 온 술 냄새까지 더해지며, 은자골탁배기는 80년 넘게 이 자리에서 조용히 역사를 이어왔다.

은자골탁배기의 시작은 1940년대. 임주원 대표의 시아버지 고 이동영 씨가 젊은 나이에 매형의 양조장에서 기술을 배워 스무 살도 되기 전부터 술을 빚기 시작하면서다. 손끝으로 익힌 감각은 금세 인정받았고, 결국 매형이 수십 년 이어온 양조장을 그대로 넘길 만큼 깊어졌다.

그 시절 이동영 씨의 막걸리는 동네 사람들의 삶과 맞닿아 있었다. 취한 이를 리어카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던 밤, 쌀 한 되를 들고 와 술 한 병으로 바꾸던 시절, 전쟁 속에서도 술맛에 반한 인민군 병사가 양조장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술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마을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막걸리의 인기가 급격히 식으며 작은 양조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4년 시아버지가 별세하자 양조장을 이어받은 임주원 대표에겐 ‘닫을 것인가, 지킬 것인가’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를 다시 술독 앞에 세운 건 뜻밖의 계기였다. 은척면을 방문한 경북대 미생물학 교수가 더위를 식히러 들른 집에서 마신 물 한 잔에 반한 것이다. “교수님이 ‘이 물은 막걸리 빚기에 최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막걸리는 술이 아니라 전통 발효음식이라는 말도 해주셨어요. 그 이야기가 참 크게 남았어요.”

그날 이후 임 대표는 발효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효모의 활성을 이해하고, 전통 제조 과정의 문제를 하나씩 짚어 나갔다. 막걸리가 가지는 텁텁함과 잔향, 트림 냄새 같은 단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십 번의 시도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단 하나의 원칙은 ‘기다림’이었다. “저온에서 천천히 숙성시키면 술이 스스로 맑아져요. 부드럽고 깔끔한 맛이 살아나죠. 시간이 맛을 완성하는 거예요.” 현재 양조를 맡고 있는 3대 양조인 이재희 씨도 같은 생각이다. “조금이라도 서두르면 절대 원하는 맛이 안 나옵니다. 술은 익는 속도가 있고, 그 속도를 존중해야 해요. 기다림이 결국 우리 술의 힘이에요.”

세월이 흐르며 양조장은 현대식 설비를 갖추었지만, 한곳만은 그대로 남겼다. 양조장 깊숙한 곳의 오래된 녹색 문, 그리고 그 너머의 사입실. “시아버지가 쓰던 방이에요. 그 문을 보면… 아직도 숨결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임 대표의 말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는다. 현재 은자골 양조장은 전통 발효실과 현대식 발효실을 분리해 운영하고, 고두밥을 찌고 말리는 공간, 저온 숙성실, 자동 병입 라인까지 체계적인 공정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새로워져도 ‘기다림’이라는 철학만은 바뀌지 않는다.

늦게 익고, 천천히 깊어지는 술. 시간이 만든 맛을 한 병에 담아내는 은자골탁배기. 이곳에서는 오늘도 조용한 발효의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