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태 칼럼] 부베의 연인
2025-11-23 대경일보
잊을 수 없는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흑백의 영상으로 펼쳐지는 이탈리아 전후(戰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영화 속 줄거리에 대한 내용 대신 영화를 보며 비록 흑백의 영상이지만 1963년의 거리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담기기 시작한다. 그 시절의 풍경과 거리, 시간과 공간이 차단된 세상을 만났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지고 여행 자유화로 동서양 어디든지 안가는 곳이 없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서나 그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사는 사람 모습만 좀 다를 뿐. 그런데, 영화 속의 이탈리아 소도시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인류가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를 만난 것이 행운일까? 불행일까?
우리 인류는 전 세계 컴퓨터를 연결하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 정보를 주고받는 글로벌 통신망을 만들었다. 사람과 기기가 연결되는 연결망과 데이터가 오가는 세계적 연결 구조가 형성되었다. 지금은 서울에서 유행하면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그 유행을 빠르게 만난다. 극강의 개방성과 동질감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K-팝 댄스를 세계 곳곳의 유명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이라니까 아직까지도 실감나지 않는다. 너무 빠르고 짧게 최신 유행이 확산되고, 모두에게 유용한 정보는 세계인이 공유하며 즐기는 세상이 왜 이렇게 못마땅할까?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처음 일본에서 다시마의 깊은 국물 맛이 글루탐산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감칠 맛’이라는 제 5의 맛을 발견했다. 이 후 글루탐산나트륨(MSG)를 결정화 하여 식용조미료로 만들었고, 세계는 그 맛에 환호하며 어디를 가나 MSG를 가미한 음식이 세상에 널리 보급되었다. 문제는 세계 어디를 가나 MSG로 인해 음식의 맛이 동일한 것이다. 미국이나 이탈리아나 프랑스, 일본, 한국이나 입에 익숙한 그 맛으로 인해 각 나라 특유의 고유한 맛이 MSG가 대신하고 동질화 된 것이 너무 아쉽다. 마치 그것처럼 말이다.
신비감도 없어지고 지역적 특성과 특징도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한다. 흑백화면에 등장하는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불편하게 보이는 저 이탈리아 시골 풍경과 생활상이 전해지는 방법이 당시에는 느렸다. 전달하는 매개체가 없으니 간혹 영화 속에서 만난 풍경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저 곳을 가려면 비행기가 아닌 타임머신을 타고 가야한다. 너무나 빠르게 정보가 공유되고 전달되는 세상의 이기(利器) 덕분에 세상 모두가 같은 음식, 가구, 거리, 풍경, 문화를 갖게 되었다.
영화 속 그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한 줄기 소중한 흑백영화 속의 풍경으로 남아 나의 아쉬움을 달래 줄 뿐이다. 비가 내리듯 불안정하고 낮은 화질의 화면이 오히려 고맙고 정겹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보루인 영상 속의 옛 추억과 세상 곳곳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또 다시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 집의 오래되고 낡은 모니터로는 재생조차 되지 않는 4K, 8K 고화질의 영상을 제공하는 기기로 만든 가짜 영상이 또한 그것이다. 지난 해 12월에 출시된 텍스트를 비디오로 생성해주는 모델, 소리(Sora)의 탄생이다.
사용자들이 AI로 만든 짧은 비디오 컨텐츠를 여러 장면으로 이어 붙이기 방식으로 영상구성이 가능한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제는 ‘눈 내리는 겨울바다’라고 입력하면 해당 내용에 맞는 장면을 영상으로 만들어주고,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감정 표현마저 구현하여 복잡한 영상도 제작이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다. 영화 속 배우들의 애절하고 간절한 눈빛 대신 컴퓨터 키보드의 명령으로 원하는 영상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니 마치 가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나의 이런 마음은 편협한 것 일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정보화, 세계화, 고도의 문명화의 터전에서 살아가겠지만, 웬지 자꾸 미안한 마음이다. 우리 세대가 이룩한 인터넷 기반의 4차 산업혁명이 오히려 각 나라마다 자신의 특색과 아름다운 정서를 발전시키는 터전을 지우는 기반이 되게 한 것은 아닌지... 다소 폐쇄적일 수는 있지만, 정보가 늦어 오히려 더 자신의 특색을 더 강화하는 세상을 망가뜨린 건 아닌지 염려된다. 1963년, 그 언제 적일 것인지도 모를 오래된 낡은 화면에서 이탈리아 시골의 거리와 소품을 보며 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화면을 바꾸니 너무나 밝고 선명한 총천연색의 영상이 지나간다. 깨끗하고 밝고 화려하지만 어둡고 잘 알아 볼 수도 없는 수십 년 된 영상이 더 좋은 것은 나만의 아집일까? 애절하게 들려오는 ‘부베의 연인’의 서정적이고 애절한 음악이 내 귓가를 지나며 나의 이런 감정의 깊이를 더 하고 있다.
정상태 공학박사·기업경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