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묵계서원(默溪書院)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묵계서원은 안동시내에서 길안천을 따라 영천으로 내려가는 35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도로에서 보이는 언덕배기, 100m쯤 구 고갯길을 올라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2003년 10월에 세워진 선장대에 올라 길안천과 들판을 바라보니 마음이 편안해 진다. 사색은 철학을 낳고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한가운데에 종택이 자리 잡고 있고, 서원에서 만휴정 사이의 약 700m 길은 ‘안동도보여행길 3選’ 중 하나로 선정된 정겨운 시골길이다. 길안천 변에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서원에서 길안천을 건너면 만휴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그 아래는 시원한 폭포가 하나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연혁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 서원이다. 1687년 (숙종 13년) 서원을 세우고, 1706년(숙종 32년)에는 사당인 청덕사(淸德祠)를 건립하여 장령(掌令) 옥고(玉沽)와 보백당(寶白堂)김계행(金係行)을 제향하고 있다.
1869년(고종 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설하지 못했다. 1925년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읍청루(挹淸樓)·진덕문(進德門) 등 일부 건물을 중건했으며, 서원 옆에 보백당 선생 신도비와 비각을 건립했다. 1980년 경북지방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됐으며 매년 8월 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구조

경내의 건물로는 외삼문인 진덕문, 누각의 형식을 한 읍청루, 동재인 극기재(克己齋), 강당인 입교당, 내삼문, 사당인 창덕사가 있다. 서원의 좌측에는 고직사가 위치하고, 우측에는 보백당 선생의 신도비각이 조성되어 있다.

◇사당

사당인 청덕사는 내부에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 옥고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으로 두리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단청을 하였다.

◇강당

강당인 입교당은 정면 중앙 3칸의 마루와 좌우로 이어지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측면은 2칸 규모이다. 집의 가구 방식은 5랼가이며,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을 꾸몄다.
좌우의 방은 둘 다 통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마루에서의 출입문은 칸마다 만들었다. 앞의 칸에는 4짝들어열개문으로 벽면을 채웠고, 뒤칸에는 한짝여닫이 문을 달았다. 마루의 후면에는 각 칸마다 2짝여닫이의 골판문으로 마감하였다.

◇동재

동재의 위치에 서있는 극기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맞배집으로 되어 있다. 방은 2칸의 통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래쪽으로 마루가 연결된다. 방과 마루 전면 모두에 길게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마루는 측면과 후면으로 문을 달고 전면으로만 개방되어 반내부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방은 후면을 제외하고 전면 각 칸, 측면, 마루 쪽 모두 2쪽마닫이문을 달았다.

◇읍청루

읍청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식 건물로 팔작지붕 형식으로 하고 상하의 모두 두리기둥을 쓰고 있다. 누각 아래로도 출입이 가능하며, 누의 오른쪽에 2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내부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누의 사방으로는 계자난간을 둘러 건물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고직사

서원의 좌측에 위치한 ㅁ자형 집으로 서원과는 좌향이 일치하지 않게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마루, 광, 방 등이 연결되고 정면으로 보이는 대청은 3칸 규모이다. 대청의 우측으로 2칸의 큰방이 있고, 맞은편에는 1칸 크기의 건넌방이 2개 아래위로 이어진다. 방들에는 각각 부엌과 아궁이가 붙어 있으며, 외부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고, 가운데의 마당 쪽으로 개방되어 있는 형식이다.

◇기타

진덕문인 외삼문은 정면 3칸 규모의 평대문이며, 내삼문은 단청을 하고 각각의 문마다 태극을 그려 넣었다. 경내에는 백일홍나무를 강당의 우측과 사당 앞에 식재하여 서원으로서의 격식을 갖추었고, 강당의 좌측에는 고직사 쪽으로 출입할 수 있는 일각문이 나 있다.

◇만휴정(晩休亭)

이 건물은 묵계서원 맞은편 산중턱에 있는데 보백당 김계행이 1500년(조선 연산군 6년)에 지은 정자이다. 김계행은 문신으로 청백리에 뽑혔던 분이다. 안동 소산에서 태어나 성균관에 입학하여 점필재 김종직과 교유하였다. 5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한 선생은 대사성,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 연산군의 폭정을 만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이 정자를 짓고 ‘쌍청헌’이라 하였다가 나중에 ‘만휴정’으로 바꾸었다.
동남향으로 자리한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앞쪽은 3면이 개방된 누마루 형식으로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누각 주위 3면에 계자각 난간을 둘렸다. 전면 쪽을 고스란히 개방하여 툇마루로 구성한 예는 흔하지 않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八作)으로 처마앙곡과 안허리가 매우 날카로워 정자의 맛을 더욱 살리고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73호로 지정되어 있다.

☐늦은 과거 급제였지만 영예로웠던 보백당 김계행

조선시대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른 삶을 지향했다. 그들은 빈곤을 참으면서 인격을 도야하고 학문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관직에 나가면 임금을 보필하여 올바르게 정사를 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설령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임금의 눈 밖에 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끝내 임금이 잘못을 고치지 않고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나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의 방식이었고, 김계행의 삶은 그 전형이었다. 그는 후손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 못했다. 그가 물려준 것은 청렴하면서도 방정(方正)했던 삶의 자세뿐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적 유산은 오랫동안 그 후손과 지역 사람들에게 기억되었고 삶의 지표가 되었다.
김계행은 1430년(세종 12)에 태어나서 1517년(중종 12) 보백당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생원시에 입격(入格)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문과는 많이 늦어져 51세가 되어서야 급제하였다. 하지만 과거 급제에 연연하거나 관직에 나가려고 초조해하지 않았다.
당대의 학자였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과 도덕 수양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33세 때인 1462년(세조 8) 경상도 성주의 향학 교수를 시작으로 관로(官路)에 발을 들인 이후에는 관직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인격과 능력을 인정한 주변 사람들의 추천으로 주로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사헌부에서는 장령, 사간원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 대사간을 두루 역임하였고, 대사간도 두 차례 올랐다. 또 표연말(表沿沫), 최부(崔溥), 유숭조(柳崇祖)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뽑혀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승정원의 동부승지, 우승지, 도승지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이조정랑, 예조참의, 병조참의도 지냈다.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관직 생활은 불과 17년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만큼 관직 교체가 잦은 편이었다. 그것은 그가 임금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直言)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하는 일 없이 관직이나 보전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정책에 잘못이 있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평소의 소신과 학문을 바탕으로 조리 있게 비판하였고 조금도 시류나 인기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외척의 전횡이나 총신의 부정부패, 제도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행위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와 국정의 혼란상을 상세히 비판하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자주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등용되었고, 그때마다 관직은 조금씩 높아졌다. 그를 아끼는 동료들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대한 동료들의 애정은 그의 퇴직 이후 벌어졌던 두 차례의 사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1498년(연산군 4년) 그의 벗이었던 김종직이 지었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던 무오사화 때, 그 역시 연루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1504년(연산군 10년)벌어진 갑자사화 때도 역시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다. 이때는 연산군의 처형이었던 신수근(愼守謹)이 그가 평소 외척과 내시의 부정부패에 대해 강경한 비판을 일삼은 데 앙심을 품고, 갑자사화에 그를 끌어들여 해치려 했었다.
또 그 이듬해에는 연산군이 직접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횡포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그를 국문하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연산군 말년의 몇 년 사이에 세 차례 국문을 당하며, 생사의 기로에 섰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성품과 인격을 흠모하고 그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선후배 관원들의 적극적인 비호에 힘입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동료들과 죽음을 함께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 했다.

☐청백을 유산으로 남기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권력에 연연하지 않은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그의 조카이자 국왕의 총애를 받던 국사(國師) 학조(學祖)와의 일화에서 잘 알 수 있다.
학조는 늦은 나이에 향학 교수라는 낮은 관직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숙부를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일이 있어 성주에 가게 되자 향교로 그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성주 목사가 김계행을 불러오게 할 테니 갈 필요 없다고 만류하면서, 사람을 보내 그를 오게 하였다. 그는 가지 않았고, 학조는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가 뵈었다.
그러자 김계행은, ‘네가 임금의 은총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구나. 나이든 삼촌에게 찾아와 인사드리지 않고, 도리어 나를 부르느냐?’ 하고 나무라면서, 살집이 터져 피가 나기 직전까지 회초리를 때렸다. 조금 뒤 학조가 변명하면서, ‘숙부께서 오랫동안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셨는데, 혹 관직에 뜻이 있으면 힘을 써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화를 내면서, ‘내가 네 덕으로 관직에 오른다면, 다른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느냐?’ 하면서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당시 학조의 권세가 매우 커서, 그가 성을 내면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김계행은 조금도 그에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학조가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할까봐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품은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은거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연산군 즉위 이후 대사간으로 재직하면서 외척과 권신(權臣)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온갖 횡포를 자행하자, 여러 차례 논박(論駁)하며 잘못을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임금의 잘못을 세 차례 간언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 한다’는 선비의 도리를 실천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고향 집 옆에 보백당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은거하며 후진 양성과 자손 교육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그가 후진 양성에서 중요시했던 것,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평가할 때 자부할 수 있었던 것은 청렴결백한 처신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 ‘보백당’이라는 이름에 대한 해설로 지은 다음의 시이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吾家無寶物)/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네(寶物惟淸白)”
자기 가문의 자랑은 청백한 삶을 유지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종하면서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
이어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오랫동안 임금을 지척에서 뫼시었다. 그러나 조금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살았을 때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니 장례 역시 간략하게 치르는 것이 좋겠다. 또 절대 비석을 세워 내 생애를 미화하는 비문을 남기지 말아라. 이는 거짓된 명성을 얻는 것이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이 모시던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던 그로서는, 임금을 잘 보필하여 성군(聖君)을 만들지 못한 자책만 남은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경북서원지(개정판)>국학진흥원
<조선왕조실록소재 안동인물초>안동문화원

자문위원
한학자 정신문화발전위원 목천 이희특, 동화작가 김일광, 시인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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