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석 포항시립교향악단 상임단원

 

한 신문에서 한국의 음악적 정서는 '한'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오늘은 한국적인 '한'의 정서를 가진 작곡가를 한번 소개할까한다. 바로 차이콥스키이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이다. 차이콥스키는 1840년 5월7일 우라르의 웝트킨스크에서 광산 감도관인 아버지와 프랑스 이민3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음악적 재능은 어머니로 물려 받았다고 한다. 전기에 의하면 차이콥스키는 1893년 11월6일 콜레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다방면으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음악뿐만 아니라 언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6세에 독일어를 이해하였으며 7세에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고 한다. 음악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고 섬세한 귀를 가졌으며, 7세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다. 차이콥스키는 법률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나중에는 음악으로 바꿨다고 한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적인 '한'은 어떠한 성격에서 비롯되었을까? 차이콥스키의 병적을 살펴보니 우울증과 동성애, 그리고 자살에 관한 것이었다. 정신과 의사 폰 뮤렌달 박사의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차이콥스키는 26세에서 52세에 이르는 26년간에 걸쳐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폰 뮤렌달 박사는 입원환자에게 여러 가지 음악을 들려 주는 임상 실험을 하였는데 환자에게 차이콥스키는 '비창' 교향곡을 들려 주었더니 내인성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 절망감을 갖게 되었고, 심한 경우에는 자살 충동마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실험 결과로 차이콥스키의 우울증은 내인성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그의 음악이 힘차고 활발하며 정열적인 반면에 우울하고 감상적인 면이 있는 것은 그의 정신상태의 양극성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책에 이러한 내용이 있지만 연주자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연주하면 가슴에 왠지모를 먹먹함이 항상 있다고 할까? 슬프기도 하고 마지막 악장은 항상 새로운 희망을 향해 가는 듯한 메세지가 있지만, 오직 6번 교향곡 '비창'만은 음악적 결말이 비극으로 끝난다.

차이콥스키는 결혼후 더 심한 우울증상을 보였으며, 그럴때마다 술과 담배를 하였다. 특히 밤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작곡을 할 때는 안절부절하였으며 물건을 집어 던지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극도로 신경을 썼기 때문에 그와 친한 사람들도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예민하고 히스테리한면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 일단 연주자로서 예민한 면은 소리에 대한 집착이랄까? 뭔가 맞지가 않으면 일단 거슬린다. 그리고 연습할때 방해받는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연습을 하지 못하면 불안해한다. 나도 이정도인데 차이콥스키는 이러한 것에 100배는 뛰어넘는 예민한 사람이었던 같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차이콥스키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강했는데 어린나이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갈때 어머니곁을 떠나지 못해 강제로 떼어 놓았는데 그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마차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차이콥스키의 일생을 지배하였으며, 어머니 이외의 여성을 숙명적으로 거부하게 되었다는 계기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그가 14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콜레라로 돌아가시자 어머니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가지고 있던 차이콥스키는 어떤 여성도 사랑할 수 없는 상처가 된것이 아닐까?

한편으로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던것 같다. 차이콥스키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스스로 한심하다고 느낄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1891년 미국에 초청되어 처음으로 뉴욕에 갔을 때 썻던 일기에는 "호텔에 들어와 짐을 푸니 비로서 마음이 놓인다. 우선 나는 모든 일을 다 젖혀놓고 실컷 울었다. 그리고 나서 목욕을 하고 식사를 했다"고 서술돼 있다. 차이콥스키의 우울증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유일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차이콥스키는 37세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실은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1877년 7월 10살 연하의 음대생 안토니나 이바노브 밀류코바와 결혼하였다. 안토니나는 집요하고 끈질기게 구애를 하였는데, 차이콥스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토니나는 자신과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차이콥스키는 고민끝에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이야기 했지만 이러한 고백에도 소용이 없었다. 이러한 집요함에 차이콥스키는 마지못해 결혼을 하였지만 결혼생활은 오래 갈 수 없었다. 결혼을 몹시 후회하여 자살을 결심하고 모스코바 강에 몸을 던졌으나 실패로 끝났다. 결국 결혼후 9주만에 파국을 맞게 된다. 그러나 안토니나는 이혼에 동의하지 않아 법률상 부부관계만 지속되었다. 안토니나는 3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차이콥스키의 자식은 없었다. 안토니나는 행복하지 못했고 정신병에 걸려 병원에서 죽게 된다.

차이콥스키와 폰메크 부인과의 관계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러시아 철도 소유자였던 폰 메크의 미망인 나데츠다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아주 좋아했다. 남편의 죽음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녀는 차이콥스키보다 9살이나 많았다. 차이콥스키는 결혼 전부터 폰 메크 부인에게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무려 14년동안 계속된 그들의 관계는 매우 특이했다. 폰 메크 부인은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경제적인 후원을 하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차이콥스키는 이 제안을 받아 들였다. 이후 14년간 많은 후원금을 받았다. 또한 만나지 않는 대신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편지의 수는 약 1천100여 통이나 되며 편지 내용은 음악에 대한 의견과 개인적인 속사정까지 쓰여 있어 훗날 차이콥스키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가 편하게 작곡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하였다. 자기의 별장을 빌려 주기고 하고 해외여행을 가면 경비를 전부 대주었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는데 차이콥스키가 피렌체에 머물면서 작곡 활동을 할 때 폰 메크부인도 때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게 되어도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 지나쳤으며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뭔가 연인과 같지만 만나지는 않는 요새말로 약간의 썸을 서로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늘은 포항시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를 하는 날이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을 연주한다. 이곡은 폰 메크 부인에게 후원을 받고 결혼생활에 후회를 하며 모스코바 강에 몸을 던진 해에 작곡된 곡이다. 차이콥스키는 곡을 세세하게 설명을 붙여서 폰 메크 부인에게 선물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으며 우수에 잠기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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