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은 서안동 나들목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 방면으로 가다가 하회마을로 우회전해 들어간다. 거기서 조금 가다가 병산서원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된다. 하회마을 삼거리에서 시작되는 병산서원 가는 길은 흙먼지 폴폴 나는 비포장 길로써 4km정도 된다. 버스는커녕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만큼 좁은 산길이다. 하루 2대의 버스밖에 다니지 않는 비포장 길이지만, 서원으로 가는 길은 오랜 세월 동안 강줄기가 만들어낸 퇴적과 침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물이 휘어져 돌아가며 끊임없이 안쪽에 모래를 쌓고 반대쪽으로는 산을 깎아 넓은 백사장과 병풍 같은 절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낙동강과 동행하면서 천천히 옛길을 따라가다 보면 인적 드문 산길도 적적하지 않다.

외삼문 복례문 앞에는 10~20그루의 백일홍과 노송들이 심어져 있고, 더 나아가면 폭 150여m의 백사장이 펼쳐진다. 이어 폭 100여m의 낙동강이 있고 반대쪽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병산이다. 뒤로는 화산(花山)을 두고 있다. 가장 뛰어난 조선시대 서원 건축 가운데 하나인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임진왜란 때 세워진 서원으로 1868년 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 시에도 폐철되지 않은 곳으로 소수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5대 서원에 드는 곳이다. 병산서원의 배치나 구성은 매우 표준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일컬어 말하기를 미술적인 측면이나 건축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연혁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병산서원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이 그 전신이다. 1572년(선조 5년) 유성룡이 지금의 병산리로 옮겨 놓았으나 서당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불태워졌다. ‘영가지(永嘉志)’에는 1605년(선조 38년) 남쪽 묏부리 자좌오향(子坐午向)의 터로 이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613년(광해군 5년)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등 유림의 공의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20년(광해군 12년)에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호계서원(虎溪書院)의 전신이었던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년)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와 주향하고 있다. 같은 해에 아들인 수암(修巖) 유진(柳袗)을 배향하였으며, 1863년(철종 14년) ‘병산(屛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3월과 9월 초정(初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구조
화산(花山)의 동남측 경사지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앞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건너편의 병산(屛山)을 마주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복례문(復禮門)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인 광영지(光影池)가 있고, 정면으로 문루인 만대루를 마주하게 된다. 만대루 아래를 지나면 좌우에 동·서재가 위치해 있고, 앞으로는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서 있다. 강당의 뒤쪽 우측에 사당영역, 좌측에 장판각이 배치돼 있으며, 사당의 우측으로는 전사층이 앉아 있다. 서원의 우측에 고직사가 따로 독립해 있으며, 고직사 앞쪽으로 뒷간을 두었다.

◇사당
여러 개의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들어서면 존덕사(尊德祠)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건물이 마주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으로 단청을 하고 처마는 겹처마로 꾸몄다. 사당의 전면 기단 앞으로 팔각으로 기둥을 깎은 정료대가 2개 서 있고, 우측 계단 옆에는 관세대가 놓여 있다.

◇강당
입교당(立敎堂)이란 현판이 걸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세 칸은 마루를 꾸미고 좌우에 방을 두었다. 마루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며 뒤쪽으로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좌우의 방은 통칸으로 명성재(明誠齋)라는 현판이 걸린 우측의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곳이고, 경의재(敬義齋)라는 좌측의 방은 유사들이 사용하던 방이다. 명성재는 앞으로 툇마루가 있고 후면으로는 벽장이 돌출되어 있으며, 경의재는 툇마루 대신 앞에 쪽마루가 연결되어 있다. 방들의 전면에는 쌍여닫이문을 내고, 마루 쪽 좌측 방은 앞 칸에 쌍여닫이창을 뒤 칸에는 쌍여닫이 불발기문을 달고, 우측 방에는 쌍여닫이 불발기문만이 있다. 모든 기둥을 두리기둥으로 하였으며, 상부구조는 5량가이다.

◇동재·서재
동재와 서재는 비슷한 평면에 마주 보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강당 쪽 두 번째 칸은 마루방으로 양쪽에 한두 칸 크기의 온돌방으로 연결하였다.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고, 전열의 기둥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동재의 큰방은 동직재(動直齋), 서재의 작은방은 장서실(藏書室)이란 현판이 있다.

◇만대루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만대루(晩對樓)는 복례문을 들어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 진입할 수 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정면이 매우 긴 보기 드문 건물이다. 서원마당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만대루를 통과해야 하고 이때 보게 되는 루의 아래 기둥들이 매우 자연스런 곡선을 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아래 기둥들은 목재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썼기 때문에 휘어진 모습 그대로의 기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다.
이에 반해 누각위의 기둥들은 아주 반듯하게 치목한 것들을 사용하였다. 루에 오르면 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마주 보이는 병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 건축의 자연친화적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건물이다.

◇기타
서당의 좌측으로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판각이 있으며, 우측에는 전사청이 위치해 있다.
장판각은 내부가 모두 마루바닥으로 되어 있으며, 전사청은 좌측부터 마루방, 온돌방, 부엌의 순서로 평면 구성이 되어 있으며 마루방과 부엌은 판문을 달고, 온돌방에는 쌍여닫이문으로 하였다.
고직사는 ㅁ자 집으로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3칸 크기의 대청이 마주하고 좌우에 방을 두었다. 우측의 안방은 통칸으로 2칸 크기이며, 좌측의 건넌방은 아래위를 나누었다. 방들 아래에는 부엌과 아궁이가 있고, 대문 칸의 좌우로는 방과 광들이 이어진다.
외삼문인 복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광영지(光影池)라는 작은 방형의 연못을 조성하고 가운데 원형의 작은 섬을 만들어 천원지방의 세계를 넣었다. 고직사 앞에는 토석담장 위에 짚으로 지붕을 한 달팽이 모양의 뒷간이 있다.

◇배향인물

□조선의 명재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출생지는 의성(義城)이다. 관찰사 중영의 제2자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년) 사마양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과 춘추기사관(春秋記事官)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년)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경연검토관·홍문관수찬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후 양관대제학을 거쳐 1590년 우의정에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러 반대파의 탄핵으로 면직되었으나 의주(義州)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으며, 이어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 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었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도학·문장·덕행·글씨가 두루 뛰어났고, 바둑도 아주 잘 두었다고 한다. 안동의 병산서원, 호계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에 <서애집><징비록>이 있고, 편저에 <황화집><정충록> 등이 있다.

□조선 중기 문신 수암(修巖) 유진(柳袗) (1582-1635)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자는 계화(季華)이며 호는 수암(修巖), 영의정 유성룡의 제3자이다. 노경임의 문인으로 1610년(광해군 2년)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 때 무고를 받아 5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이덕형·심희수 등의 변호로 풀려났다. 1616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인조반정 뒤 봉화현감이 되고, 이어 형조정랑이 되어 오래 묵은 원옥을 해결하였다. 1627년(인조 5년) 허위보고를 하였다 하여 청도군수에서 파직되었으나, 1634년 재등용되어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만년에 상주 낙동(洛東)으로 이거했다. 안동의 병산서원에 부친인 유성룡과 같이 제향 되었으며, 문집에 <수암집>이 있다.

-조선조 명재상 유성룡의 일화

유성룡(柳成龍)에게는 바보 숙부(痴叔·치숙)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콩과 보리를 가려 볼 줄 모를 정도로 바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숙부가 유성룡(柳成龍)에게 바둑을 한 판 두자고 했다.
유성룡은 실제로, 당대 조선의 국수(國手)라 할 만한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아버지 항렬이 되는 사람의 말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두었는데 막상 바둑이 시작되자 유성룡은 바보 숙부에게 초반부터 몰리기 시작하여 한쪽 귀를 겨우 살렸을 뿐 나머지는 몰살당하는 참패를 했다.
바보 숙부는 대승을 거둔 뒤 껄껄 웃으며 "그래도 재주가 대단하네. 조선 팔도가 다 짓밟히지는 않으니 다시 일으킬 수 있겠구나." 라고 말했다.
이에 유성룡은 숙부가 거짓 바보 행세를 해 왔을 뿐, 이인(異人)이라는 것을 알고 의관을 정제하고 절을 올리고는 무엇이든지 가르치면 그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숙부는 아무 날 한 중이 찾아와 하룻밤 자고 가자고 할 것인데, 재우지 말고 자기한테로 보내라고 했다.
실제 그날, 한 중이 와 재워주기를 청하자 유성룡은 그를 숙부에게 보냈는데 숙부는 중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네 본색을 말하라고 해 그가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이 조선을 치러 나오기 전에 유성룡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이라는 자복을 받았다.
그리하여 유성룡은 죽음을 모면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의 자리에서 사실상 국난을 극복하는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고 부르던 그 이인(異人)이 위기의 조선을 구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계서야담>에 나온다.

<참고문헌 및 자료>

경북서원지·한국국학진흥원
안동인물초·안동문화원

<자문위원>

한학자·정신문화발전연구위원 목천·이희특, 동화작가·김일광, 시인·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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