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 … 고산서원(高山書院)

남안동 IC에서 안동시내 방면으로 5번 국도를 타고 이동하다 남안동 휴게소 지점에서 서행하다가 원흥교, 미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광음1교를 건너기 전, 우측 도로(암산유원지 방향, 옛 구안국도)로 진입한 후 두 번째 다리를 건너 구불구불 마을길을 따라 암산유원지까지 곧장 진행하면, 암산유원지 오른편 뒤쪽 언덕 위에 고산서원이 위치하고 있다.

◇연혁
경북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34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1768년(영조 44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고산정사(高山精舍)를 창건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을 한 터전에 사후인 1789년(정조 13년)에 사람의 공의로 그의 학덕을 추모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8년 (고종 5년)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7년 다시 복설되었다. 1985년 유림의 공의로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을 추향(追享)하였다. 1985년 경북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3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구조
경내의 건물로는 강당인 호인당(好仁堂), 동재인 청임헌(淸臨軒)·앙지재(仰止齋), 서재인 백승각(百乘閣), 사당인 경행사(景行詞), 외삼문인 향도문(嚮道門), 내삼문, 전사청, 고직사, 고산정사(高山精舍)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재의 평면구성이 비대칭인 것과 전사청 영역을 담장을 둘러 독립적 공간을 확조하고 있는 것, 그리고 다른 건물들과는 축을 달리하는 정자를 둔 것이 특징이다.

◇사당
사당인 경행사는 이상정과 이광정 형제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5량가의 맞배기와집이다. 이익공계열의 집으로 단청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겹처마를 하고 기둥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측면벽체에는 와편과 자연석을 사용하여 외관을 치장한 것이 특징이다. 측면에 광장을 둔 것도 사당 건물에서는 쉽게 찾아지지 않은 형식이다. 건물의 전면 우측에 정료대가 위치하고 있다.

◇강당
서원의 강당으로 쓰이는 호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5량가구 팔작기와집이다. 우측에만 전면 1칸, 측면 2칸 통칸의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로 구성하였다. 8칸 규모의 마루는 후면으로 각 칸마다 2짝여닫이 판문을 달고 측면과 전면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마루공간의 창방 위에는 원형의 화반을 설치하여 구조적인 역할과 장식적인 요소를 단순한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집을 구성하고 있는 기둥을 방쪽에만 방형으로 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동재
동재에 해당하는 청임헌과 앙지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맞배기와집으로, 지붕의 구성이 맞배의 좌우에서 내림지붕을 이어 붙여서 ‘工’자형을 이루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2개의 방 사이에는 한 칸의 마루를 두고, 가장 아래 한 칸도 마루를 깔았다.
윗방은 칸을 나누어 반 칸 크기의 마루방을 연결한 것이 특징으로 수장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방과 마루 모두 전면으로 툇마루를 설치하고 아래의 마루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면에 문을 달았다. 전면이 개방되어 있는 마루는 누마루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앞쪽으로 난간을 두어 다른 공간과는 차별화된 성격임을 보여주고 있다.

◇서재
서재의 위치에 있는 백승각은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팔작기와집으로 동재인 청임헌과 마주보고 있다. 3칸 규모의 방 좌우에 한 칸씩의 방을 이어 구성하고, 가장 아래쪽에 마루를 설치하였다. 정면에서 보면 3칸 규모의 방에는 중앙에 2짝여닫이 판문을 달고 좌우는 벽으로 처리함으로써 입면을 매우 폐쇄적인 모습으로 만들고 있다. 문의 모양으로 보아 일반적인 주거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수장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의 방은 전면과 측면으로 출입문이 있어서 마루로도 바로 연결된다. 마루는 청임헌에서 처럼 난간을 둘러 누마루 형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방과 마루 모두 전면에 툇마루가 있다.

◇고직사
서원 경내의 우측에 위치한 ‘ㅁ’자형 집으로 이 지역 뜰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문간의 좌우에는 방과 광이 이어지고, 정면 3칸의 대청에는 좌측으로 큰방이, 우측으로는 건넌방이 위치한다. 큰방은 2칸 규모로 아래로 2칸의 부엌이 연결되며, 건넌방 아래로는 아궁이와 고방 등이 붙는다. 대청의 상량구조는 3량가로 되어 있으며, 큰방과 건넌방 위는 고미반자로 꾸몄다.

◇기타
진사청은 사당의 우측에 위치하는데, 담장을 둘러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출입문은 강당 후면과 사당 쪽으로 두 군데 나 있는데, 향사를 지낼 때 동선을 고려한 것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우측부터 방, 마루가 한 칸씩 설치되고 좌측은 흙바닥을 그대로 두었다. 마루방과 헛청 사이는 완전히 개방된 공간으로, 음식을 옮기는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방 출입문은 외여닫이 세살문이고, 마루는 쌍짝여닫이 판문이다.
서원의 일곽 좌측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고산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정자 건물로, 따로 담장이 구획되어 있어 서원에서는 바로 진입이 되지 않는다. 좌우에 방을 배치하고 가운데는 한 칸 크기의 마루를 깔아 좌우대칭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팔작기와집으로 정면에 출입을 위한 일각문이 작게 서 있다. 풍광이 수려한 전망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향도문인 외삼문은 정면 한 칸 규모로 서원 경내로 진입하는 정문이다. 사당 경내로 진입하는 내삼문은 정면 3칸의 평대문 형식으로 사당과 같이 단청의 흔적이 보인다.

■배향인물

◇이상정(1711-1781)
숙종 37년∼정조 5년. 자는 경문(景文)이고, 호는 대산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안동 출신으로 조부는 이석관(李碩觀)이고, 부친은 이태화(李泰和)이며,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이재(李栽)의 딸이다. 6세 때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 슬퍼하는 모습이 마치 어른 같았다고 한다. 윤리에 독실하여 자제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혹시라도 어기는 일이 없었고, 동년배들에 대해서도 낯빛을 바꾸거나 모진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는데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읽었으며, 12∼13세에 벌써 사서를 다 읽었다. 그리고 14세에 외조부인 밀암(密菴) 이재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마당에 난 풀을 보고는 그 기화(氣化)와 형생(形生), 자생(自生)과 종생(種生)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1729년(영조 5년)에는 같은 문하의 여러 준재들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면서 의문 나는 것을 서로 묻고 바로 잡았다. 또한 음악과 역법(曆法)과 산수(算數)에 모두 통달했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과 심의(深衣) 및 상복(喪服) 등을 그 제도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도 바로 손가는 대로 만들어내어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영조 11년)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그 뒤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1738년(영조 14년)에는 연원승(連原承)에 제수되었다. 1739년(영조 15년)에 조정에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1741년(영조 17년)에 휘릉(徽陵) 별검(別檢)에 제수되었으며, 1747년(영조 23년)에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예조와 병조의 낭관(郎官)으로 옮겼다.
1751년(영조 27년)에 예조의 낭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53년(영조 29년)에 연일현감(延日縣監)에 제수되었는데, 1년도 채 안 되어 그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1755년(영조 31년)에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758년(영조 34년)에 다시 주상의 특명으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으며, 1762년(영조 38년)에는 감찰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저서로는 <대산집><이기휘편><제양록><퇴계서절요><사례상변통고><병명발휘> 등이 전하고 있다.

◇이광정(1714-1789)
숙종 40년∼정조 13년.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소산(小山)이다. 일직(一直) 출생으로 목은 이색의 후손. 태화(泰和)의 자. 영남학파의 대학자 상정의 동생이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15세의 나이로 부형을 따라 진압군에 참여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증광향시, 1740년에는 동당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전시(殿試)에 불리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형 상정의 지도를 받아 이황(李滉)의 학풍을 계승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과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을 익혔으며, 조명천(趙命天), 이평중(李平仲), 조성여(趙聖與) 등과 교유하였다. 1783년(정조 7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온릉참봉(溫陵參奉)·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暑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84년(정조 8년)에는 다른 영남의 학자들과 함께 ‘초계문신강의’를 검토·교정하는데 참여하였는데, 정조의 인정을 받아 특별히 6품직에 임명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저서에 <소산집>이 있고, 남후(南後) 고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문신·학자 대산(大山) 이상정의 일화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文臣)이자 대표적 성리학자인 대산(大山) 이상정(1711~81)은 ‘소퇴계(小退溪)’라 불릴 정도로 출중한 선비였다. 진정한 학문 수행에 천착함으로써 도학(道學:성리학)을 다시 꽃피우고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길러낸 그는 조선 후기 영남학파의 대표적 거유(巨儒)로, 퇴계 이후 제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퇴계 이황을 제일 존경하고, 평생 도학을 공부하며 퇴계학 정립을 위해 노력한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그의 제자 인명록인 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에 올라있는 문하생만 273명에 이른다.
대산 조부(석관) 시절 이야기다. 하루는 석양 무렵에 한 나그네가 석관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석관은 길손을 사랑방으로 안내하고 며느리에게 저녁상을 차려 오게 했다. 그런데 과객은 저녁상을 윗목으로 옮겨놓은 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식사를 안 하는지 묻자, 과객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사실은 오늘이 아버님 제삿날입니다. 먼 길을 떠돌다 보니 제사를 모실 형편이 못 돼서, 이따가 시간이 되면 이 밥상으로 제사를 모시고 먹으려 합니다.”
“그런 곡절이 있었군요. 국이 식기 전에 어서 식사를 하시오. 제사상은 다시 보아 오도록 하겠소.”
과객이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으나, 석관은 “제사를 그렇게 허술하게 모셔서야 되겠느냐. 새로 제사상을 마련하도록 할 테니 미안해하지 말고 식사를 빨리 하라”고 권했다.
그러고는 며느리를 불러 사정을 이야기한 뒤 제사상을 따로 마련할 것을 부탁했다. 며느리는 흔쾌히 대답한 뒤 상을 정성껏 마련했고, 석관은 옆에서 제사를 도왔다. 그날 밤 며느리의 꿈속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오늘 당신이 차려준 음식을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흰 구슬 두개를 주기에 치마폭으로 받았다. 그 후 태기가 있게 된 며느리가 낳은 아들이 대산이다.
대산에 이어 나중에 대산의 동생 소산(小山) 이광정이 태어났다. 대산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렇게 태어난 대산은 5세에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14세가 되어서는 외할아버지인 밀암(密庵) 이재(1657~1730)에게 나아가 공부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시경, 서경, 중용, 맹자, 태극도설, 주자서절요, 근사록, 가례 등 성리학과 예학에 대한 공부를 함으로써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20세 때 외조부이자 스승인 밀암이 별세한 후 그는 달리 스승을 정하지 않고 동생과 함께 서로 탁마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1735년 과거(대과)에 합격한 대산은 이듬해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의 권지승문원부정자라는 관직을 처음 맡았으나, 1개월 남짓 후에 벼슬자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여러 자리를 거쳤으나 사직을 반복, 실제 관직생활은 급제 이후 45년 동안 6년 정도에 불과했다.
이처럼 짧은 관직생활은 정치적 환경 탓도 있겠지만, 벼슬보다는 학문에 침잠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 대산의 적성에 더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산에게 벼슬이나 권세는 학문과 자유로운 생각을 구속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선비가 벼슬을 하지 않으니 생활은 곤궁하여 쌀독이 자주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별로 개의하지 않았다. 생계를 꾸려가기가 심하게 어려울 때는 소장하고 있던 소중한 책들을 팔기도 했다.
벼슬이 제수되어도 병 등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거나, 부모 봉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임하더라도 곧 물러났다. 근무기간을 채워 자리가 옮겨지는 경우는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관직에는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직을 떠나서는 학문을 닦고 저술을 하며, 제자를 가르치는데 열성을 다했다. 더 앞선 학자를 찾아가서 탁견을 구하고, 동학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학들에게는 자신의 학식과 체험을 가르쳤다. 그것이 그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고향 마을의 대산서당(大山書堂), 고향 마을 인근의 고산정사(高山精舍)와 고운사 등이 그의 학문 공간이었다. 이런 가운데 그의 학문은 더욱 익어갔고, 그를 찾는 제자들의 발길은 더욱 잦아졌다. 이렇게 오로지 참된 학문의 길을 갔던 대산이기에 그의 문하에서 ‘호문삼로(湖門三老)’로 불리던 동암(東巖) 류장원ㆍ후산(後山) 이종수ㆍ천사(川沙) 김종덕을 비롯해 손재 남한조, 묵헌 이만운 등 뛰어난 학자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
호문은 대산 문하를 말한다. 그리고 선현들의 도학을 정리하고 주요 내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이기휘편(理氣彙編)’, 인간의 칠정에 대해 논한 ‘약중편(約中編)’, 퇴계의 학문 요체를 결집한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 선현들의 심신수행에 대한 글들을 채집·분류하고 약주(略注)한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등 높은 수준의 성리학 연구물들을 누구보다 많이 남겼다.
평생 심신을 닦는 학문을 해온 선비가 생을 마칠 때가 다가왔다. 숨을 거두기 며칠 전인 1781년 12월1일(음력) 아들 완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력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평소에 잘 알던 경전을 외워 보았는데 평소와 차이가 없었다”고 했다. 7일에는 동생 광정이 가르침을 청하자 “일상 가운데 묘한 진리가 있으니 일상을 떠나서 별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고 말했다. 8일에는 조카 윤에게 “지인들이 오랫동안 머물면서 병세를 묻고 있으니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 감사의 뜻을 전하라”고 말한 뒤, 자고 싶다며 물을 받아서 양치를 하고 수염을 씻고 누웠다.
9일이 되자 대산은 숨이 곧 끊어질 듯하여 말을 마칠 수가 없었다. 등에 통증이 있은 후로는 평소 누울 때 몸을 옆으로 하고 손발을 가지런히 했는데, 이날은 이른 아침에 몸을 돌려 거의 바른 자세로 누웠다. 그러나 하체는 옆으로 하였다. 모시는 아이가 부축해 다리를 바로하자 정신은 맑고 기상은 온화하였다. 얼마 후 대산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 자리에는 그의 아들과 손자, 그를 따랐던 제자 70여 명이 지키고 있었다.
대산의 제자 김종섭과 류범휴가 대산의 죽음을 기록해 남긴 ‘고종일기(考終日記)’에 실려 있는 내용 중 일부다.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공부를 점검하고 제자들에게 학문에 대해 문답을 나누며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은 그가 참다운 학문을 했음을 드러낸 일이라 하겠다.
이듬해 3월 사림 1천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장례가 치러진다. 대산은 사후 35년이 흐른 1816년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1882년에는 이조판서에 증직된다. 그리고 1910년 시호 ‘문경(文敬)’이 내린다.

<참고문헌 및 자료>
경북서원지·한국국학진흥원
안동인물초·안동문화원
영남일보 不遷位 기행(25)·2011

<자문위원>
한학자 정신문화발전연구위원 목천 이희특, 동화작가 김일광, 시인 하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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