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전 포항정책연구소장

무르익는 계절, 코스모스와 여왕의 계절, 용서와 구원의 계절이다. 무책임한 희망에 들뜨지 않고 앙상한 고요에 이르기 전 찬란한 계절이다. 넉넉하고 너그러우며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환희의 계절이다. 바로 이 계절에 지금 내가 살아있다. 윤동주가 좋아해서 나도 좋아하는 프랑시스 잠의 말대로 이는 ‘위대한’ 일이다.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을 따는 일, 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을 거두어 들이는’ 인간의 평범한 일들은 참으로 위대하다.

길 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발걸음에 운치를 더한다. 굵은 소리는 플라타너스, 여린 소리는 단풍나무다. 실리는 무게에 따라 이지러지는 느낌도 다르다. 낙엽 밟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소슬 바람 사이로 재잘거리는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너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니?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안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이다. 마음이 질문하고 뇌가 답하는 거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힘차게 디뎌져야 할 청춘의 발걸음이 무겁고 약하다. 넘을 수 없는 벽을 인정하고 순순히 받아 들이는 젊은 고뇌들이 애잔하다. 모든 인간이 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청춘의 커다란 숙제다. 누구도 정상에만 머무를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노년의 품격이다. 때가 되면 떨어져야 하는 낙엽과 같이. 다만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영원한 미제의 굴레에 미혹되지 않고 꿋꿋이 걸어가는 삶은 장하고 고결해 보인다.

한 때는 플라타너스 낙엽에 맞아 쓰러질 것 같은 시절이 있었다. 니힐리즘과 나르시시즘의 한 가운데를 서성이며 센티멘탈이라는 어깨띠까지 걸치고 다녔다. 원인 모를 ‘소명의식’은 도무지 나이 들려 하지 않았다. 숨죽여지지 않는 날 배추 잎처럼. 다행히 낙엽을 예찬하고 있는 지금은 평범과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되었다. 낙엽은 한 때 푸른 잎으로 살아 있었다는 증좌다. 이미테이션은 결코 쇠잔하는 법이 없다. 가짜로 영원히 살아남는 것만큼 무거운 형벌도 없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나 떨어질 때를 알고 사뿐히 내려앉는 늙은 이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중력과 바람을 이길 힘이 없을 때 잎은 떨어져야 한다. 메마르고 혹독한 겨울을 날 나무가 수액을 아끼려고 잎을 떨어뜨린다는 학설은 슬픈 이야기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또 새 순과 싹을 돋우어 틔우는 것이었구나.

새로운 잎은 또 새로운 시선들이, 그리고 마음들이 맞이할 것이다. 같은 나무에서 피는 싹이 같지 않듯이 마주한 사람도 그 사람이 아니다. 보다 더 숙성되었거나 노쇠하였거나 혹은 튼실해졌을 것이므로. 그 만큼의 시간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수 억만 년을 한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있는 바위라 한들 어찌 같은 바위이겠는가. 어떠한 것도 어제의 그 것과 내일의 그 것이 같을 수는 없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짙푸른 잎으로 맹위를 떨치던 과거를 뒤로 하고 스스로 낮추어 지표를 보듬어 안는 낙엽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절대자의 모습을 버리고 인간으로 육화한 신의 겸손을 낙엽에게서 발견한다. 이 신비로운 구원의 계절에 한 아름 가득 낙엽 비를 흩뿌리며 어린 아이같이 춤을 춘다. 파스락 파스락 신나게 낙엽을 즈려 밟아도 본다. 조물주에게 밟을 권리라도 부여 받은 듯이. 낙엽의 그 엄숙하고도 보드라운 속삭임이 전해져 온다. 밟아라 나는 밟히어야 한다. 밟고 살아갈 용기를, 힘을 얻어라.

죽어가는 잎들이 피워내는 화려한 군무, 핏빛 퍼포먼스를 우리는 단풍(紅葉)이라 하여 즐긴다. 처절하게 죽어가는 잎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처연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다 결국엔 우리도 죽어간다. 예외 없이 언젠가는 낙엽처럼 자연의 일부로.

앙스트블뤼테(Angstblute), 불안 속에 피는 꽃. 나무가 이듬 해 수명이 다해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이 피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유난히 크게 바스락거리는 낙엽은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죽어가면서 들려 주는 듯하다. 인간도 불안이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이뤄낸 성취에 많은 이들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게 된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알아냈듯이 나는 플라타너스 잎의 군무(群舞)로 중력을 가늠한다. 큼지막한 녀석에게 일부러 다가가서 그 무게를 몸으로 측정해 본다. 육중한 중력에 이끌려 지표 아래로 빨려들 것만 같다. 삶의 무게, 살아있다는 느낌의 무게만한 힘이다.

소임을 마치고 왔던 곳으로 제때에 회귀해 가는 낙엽은 아름답다. 세찬 바람에 쓸쓸히 그리고 한기로 옷깃을 여밀 때까지 줄기에 붙어 있는 고엽은 완고해 보인다. 이제 그만 떨어져도 되겠다. 애써 붙들고 있는 나무도 힘겨워 한다. 이미 가루로 먼지로 산화한 동료들은 존재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없다.

격정을 살아낸 늙은 끈기에 박수를 보낼 손들이 아직 따뜻할 때 이제 그만 낙하(落下) 하는 게 좋겠다. 낙엽 그 새로운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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