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홍 시인·자유여행가

동물은 자연을 생존 환경으로만 여긴다. 환경에 적응하기에 급급하다. 반면에 사람은 자연에서 풍경을 찾아 삶의 의미를 투사한다. 사람은 사물에 언어의 옷을 입혀 이름을 불러준다. 생각까지 곁들여 상징으로 삼기도 한다. 게다가 풍경화는 풍수(風水)를 형형색색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풍수의 외피를 걷어내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미의 풍경을 들추어낸다. 그러니 사람은 나무숲에 있으면서 동시에 나무로 이뤄진 기호와 상징의 숲에서 살아간다. 더구나 가을이 오면 사람은 더욱더 깊이 풍경 속으로 눈길을 주려고 한다. 그런 시선을 통해 마음속 심연으로 내려가는 줄을 타는 셈이다.

가을이 짙어가고 있다. 바람에 맑게 닦인 풍경 속에서 단풍이 눈부신 점묘화를 빚어낸다. 낙엽이 지면서 허공에 흔적 없는 파문을 남긴다. 바람이 억새밭에 은빛 물결을 일으키며 길을 잃은 채 헤맨다. 70년대 가수 장영희는 "여름이여 여름이여 가버린 젊음이여/아직 너를 그리며 가을을 앓는다"고 서글프게 노래했다. 가을은 흔히 쇠락(衰落)의 계절이라고 한다. 찬 바람이 가슴 한구석을 스치고 낙엽이라도 발밑에서 뒹굴면 까닭 모를 비애에 휩싸이기 쉽다. 나뭇잎은 봄여름 내내 햇빛을 받아 빛나는 녹색만 반사한다. 그러나 가을 서리가 내리면 추위에 약한 녹색 엽록소가 먼저 해체된다. 지금껏 가려 있던 붉고 샛노란 색소가 드러나 세상을 단풍으로 물들인다. 일찍이 서정주 시인은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가을이 반드시 노쇠(老衰)와 허무의 시간은 아니다.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로 가을에 피어나는 성숙한 삶의 경지를 노래했다. 국화꽃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서툴었던 젊음의 치기에 지친 삶을 추스르고 다독이는 게 가을에 할 일이다. 또 다른 시 '가을에'를 통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라고 읊었다. 하늘만 푸른 게 아니라 시간도 새롭게 쪽빛으로 물들어 새 길을 열어 보인다는 얘기다. 그의 시에는 가을을 알리는 새, 기러기 떼도 등장한다.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행(雁行)"이라고 노래했다. 그러면서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라고도 했다. 살다 보면 서러운 일이 가슴에 쌓이지만 가을 서리가 맺은 찬 이슬로 그런 설움의 떨켜를 말끔히 씻어내 정신의 빛을 반짝이자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사는 것은 고독 속에 침잠할 때 가능한 일이기에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순간을 가을에 누리자는 것이다.

시인 황동규는 혼자 있을 때 문득 찾아드는 삶의 기쁨을 '황홀해서 환해진 외로움'이라며 찬미했다. 그는 그 순간을 '홀로움'이란 신조어로 표현했다. 프랑스 가수 조르주 무스타키가 노래 '마 솔리튀드(나의 고독)'에서 "아닐세,나는 혼자가 아니네/내 고독과 함께 있으니"라고 흥얼거린 것과 마찬가지다. '홀로움' 상태에 빠지면 추억이 물밀듯이 몰려온다. 추억에 빠지면 지금 주변에 있는 것들이 무화(無化)되는 듯하다. 가을엔 지나가서 잊힌 것들이 어느덧 되돌아와 현재의 빈자리를 채운다. 추억을 되돌아보면 그때 못 느꼈던 것, 그때 알아보지 못한 것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사람은 가을에 과거를 다시 체험함으로써 제대로 살아보는 듯하다. 그런 의식의 반추 과정에서 과거는 신선해진다. 그래서 가을 하늘은 청명한 것이 아닐까.

소설가 김훈은 에세이 '가을 바람 소리'에서 "가을의 바람에 스치는 숲은 바람과 더불어 편안하게 풍화되어가며 운명의 속내를 드러낸다"고 했다. 바람은 차갑지만 영혼을 뜨겁게 달구기도 한다. 바람이 불면 삶의 의지가 샘솟는다. 바람은 접촉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김훈은 "바람 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라고 했다. 바람의 내부에 목소리가 있는 게 아니라 바람이 나뭇잎 하나, 사람 하나라도 스쳐야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특히 가을 바람 소리는 사람의 몸속에 감추어진 소리까지 끌어낸다. 그래서 김훈은 "악기가 없더라도 내 몸은 이미 악기다. 가을이 그러하다"고 했다.

11월이 성큼 다가왔다. 시인 황지우는 시 '11월의 나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11월은 한 해 결산을 준비하라고 알린다. 사람은 대부분 쏜살같이 지나간 시간 앞에서 죄지은 듯 머리를 긁으며 어쩔 줄 모르게 된다. "나이를 생각하면/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읊었으니 말이다. 해마다 11월이 오면 사람도 나무가 되어 생의 낙엽을 털어내기 마련이다. 11월은 시간의 환승역과 같다. 지금껏 타고 온 기차에서 내려 갈아탈 기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에서 우리는 11월을 맞는다. 역사(驛舍) 밖에는 바람이 쉼 없이 분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폴 발레리의 시구를 절로 웅얼거리게 된다. 고독이 동행하는 길엔 바람이 또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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