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홍 시인·자유여행가

'사랑의 온도탑’눈금이 올라가는 거리에서 구세군 종소리가 울려 퍼지니 또다시 연말이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하게 된다. 초겨울 날씨에 크리스마스 캐럴송까지 더해지면 어쩔 수 없이 한 살 더 먹게 된다는 사실과 함께 남을 도와야 한다는 강박에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연말이 되면 누가 다그치는 것도 아닌데 자진 납세하는 심정으로 내년에는 착한 일을 해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성선설보다 성악설에 더 신뢰가 가지만 사람들의 심성에는 남을 돕고 싶어 하는 착한 마음이 박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예전붙터 로또복권 열풍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면 눈 여겨 본적이 있다. 판매소에서 로또복권 사는 사람들에게 1등에 당첨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질문했을 때 대부분 좋은 일에 쓰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육영사업을 하겠다’,‘고아원을 설립하겠다’는 거창한 소망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로또복권 1등 당첨자를 면담하고 당첨금 수령을 도운 은행 담당자의 이야기는 실제 1등 당첨자들 가운데 기부를 하는 이는 극소수라고 했다. 1등만 들어갈 수 있는 밀실의 벽에‘당신의 작은 나눔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큰 희망이 됩니다’라는 글귀와 당첨자들이 낸 기부금 현황 패널을 걸어놨지만 당첨자들이 애써 외면한다고 했다. 대부분 복권을 잃어버릴까봐 바짝 긴장된 상태에서 도착해 당첨금이 입금된 통장을 받으면 쏜살같이 사라지느라 바쁘다는 것이다.

진짜 행운이 왔을 때 마음이 달라질지언정 사람들은‘나중에’‘좋은 일’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산다. 좋은 일의 규모가 육영사업, 고아원 같이 거대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은 바빠서 엄두를 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전국에서 들려오는 좋은 소식만 담은 인터넷 신문을 제작해 우리네 세상이 훈훈하고 안전하다는 걸 알리는 일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종이 잡지에 엄선한 선행 소식을 담아 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광고를 많이 받아 무료지로 나눠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온통 사건 사고 뉴스 판인 데다 조폭이거나 살인마가 주인공인 영화가 줄줄이 히트를 치니 방 안에서도 발을 뻗고 자기 힘들 지경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남을 도우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세상은 온통 어두운 얘기뿐일까. 그래서 아름다운 소식만 담은 뉴스레터를 만들고 싶은 꿈을 꾸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가장 바쁜 시기에 시간과 재정을 투자해 사회에 공헌하는 도반들이 있기 때문이다. 매년 돈을 들여 인문학을 전파하고 젊은이들을 초대해‘CEO 조찬’을 대접하면서 훌륭한 리더의 꿈을 갖도록 독려한다. 자신의 사업장을 스튜디오로 꾸며 일과가 끝난 후 저자와 독자 간의 소통을 도모하고, 청소년들과 멘토들의 만남도 주선한다.

누구는 출혈을 감수해 가며 어린이 뮤지컬을 제작해 소외된 이웃들에게 물질이 아닌 문화를 선물하고 있다. 젊은 친구들이 저자가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해당 전문가들의 강의를 주선하고 자신도 강의를 하기도 한다. 방송 일을 하면서 토크쇼를 통해 기업과 관객들이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가교 역할을 열심히 한다. 그리고 미혼모 돕기 프로젝트를 기획해 잡지를 만들고 수익금을 그들을 위해 사용한다. 사진을 하는 누군가는 공개 입양아들의 프로필 사진을 무료로 찍어주고 있다.

요즘 나만을 위해 달리며 바쁘다고 푸념해 봐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자신의 성취를 위해 앞뒤 안 보고 달리는 것은 바쁜 대한민국 사람들의 공통적 일상이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그 사람을 확실히 판단할 수 있다. 바쁜 지금, 시간을 쪼개 재능을 기부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 살맛이 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가장 바쁜 시기에 아무런 대가 없이‘좋은 일’을 시작한 도반들은 머리 아픈 생업에만 매달리다 사회 공헌을 함께하니 신바람이 난다고 말한다. 보람이 있는데다 칭찬까지 해주니 기분 좋고, 뜻하지 않게 좋은 사업거리까지 따라오는 경우도 생긴다고 고마워한다.

도반들이 좋은 일에‘차출’돼 경험을 전하는 것으로 갈증을 달래는 나도 서둘러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나중에 하려면 감이 떨어지는 데다 동력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활발하게 돌아갈 때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일을 도모하는 게 당연히 효율이 높다.‘나중에’와‘좋은 일’을 입에 달고 살던 이들이 은퇴 후에 별다른 소식을 들려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남의‘좋은 일’에 품앗이 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좋은 일’을 적극 추진해 봐야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이런저런 꿈을 꾸느라 머리가 복잡해야 연말 기분이 나는 듯하다. 어쨌든 나중에나마 좋은 일 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힘을 내야 할 계절이다. 우리 모두 나중에 하려던 일을 내년에 작게나마 행동에 옮기게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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