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실바노)계산성당 주임신부

훈련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신병 : ‘군화가 작은데 바꿔 주세요.’
소대장 : ‘군화가 작은 것이 아니라 네 발이 큰 것이다. 발에다 군화를 맞춰라.’
신병 : ‘그게 말이 됩니까?’
소대장 : ‘여기는 군대다, 하라면 해라! 하면 된다!’
얼마나 단순 무식한 논리인가?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어거지 같은 논리에도 나중에는 각자 발에 맞는 군화를 신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율법을 대하는 예수님의 처신은 파격적이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잘못된 관습, 형식에만 치우쳐 있는 율법을 사랑이 함께 하는 것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율법–규정은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고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유다인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이웃에게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우기만 했다.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면서 백성들까지 못 지키게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은 이런 모순과 위선을 지적하신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자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반대편에 있는 나라가 있다. 브라질이다. 시차가 12시간 난다.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현재는 비행기로 가는 것이다. 한 스무 시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다.

지구 반대편도 그만하면 갈 수 있는데 몇 뼘 안 되는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평생을 가도 못 가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에만 머물러서도 안 되고 마음 안에 담고만 있어서도 안 된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삶이 서로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다. 핵심이 빠지면 겉치레에 불과하다. 본질이 사라진 행위는 더 이상 하느님의 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도 아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고 이웃사랑이다.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 흉내를 좀 내면서 사는 것도 좋을 듯하다. 말 더듬는 사람을 흉내 내다보면 나도 말을 더듬게 된다. 마술사 흉내를 내다보면 나도 마술사가 된다. 아나운서 흉내를 내다보면 나도 아나운서가 된다. 공부하는 사람 흉내를 내다보면 나도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 흉내를 내다보면 나도 기도를 하게 되고 그 기도 때문에 더 훌륭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의 삶의 주제는 ‘사랑’이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사랑을 흉내 내보는 것이다.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시기를 바라셨다. 눈먼 이를 보게 하셨다.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우리 삶에서 가슴에 새겨놓고 살아야할 삶의 모습이 있다면 사랑이신 예수님을 흉내 내며 사는 것이다. 사랑이신 예수님의 삶을 따라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자란 사랑의 모습을 내 안에서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런 삶을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율법의 근본정신이고 율법을 완성시켜가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계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을 나누는 일에 아까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 차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그냥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면 좋겠다.

지구 반대편은 비행기로 날아가면 된다. 하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사랑이 자리하지 않으면 평생을 가도 못 가보는 여행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랑의 삶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자기 생각, 자기 안에만 갇혀있지 말고 가슴을 열고, 열정으로 이웃에게 다가서도록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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