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태 편집국장

얕은 잠에 자주 꿈이 꾸어지는 것을 보니 봄이 오기는 오는가 보다. 민감한 사람은 계절의 변화를 몸과 마음으로 조금은 빨리 느낄 수 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면 또 겨울이 온다. 변함이 없는 사계절의 순환 속에서 우리 인간도 거기에 맞춰 한 평생을 살아간다.

봄이면 씨 뿌리고, 여름이면 꽃피고, 가을이면 수확을 거두고, 겨울이면 갈무리 하는 우리의 삶에 자연의 질서는 한 치도 어긋나는 법이 없다. 태어나서 살다가 늙어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치도 계절에 의해 생멸하는 것이다. 봄에 화려함을 뽐내던 꽃들도 평생 화려할 수 없고, 여름에 싱싱하던 초록도 내내 푸를 수 없고, 가을의 붉은 단풍도 영원히 붉을 수 없으며, 겨울 추위로 꽁꽁 얼었던 대지도 따뜻한 볕에 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사리를 캐니 봄빛이 광주리에 가득하고(採薇春滿筐)/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에 마음을 씻는다.(世心嚴下水)/ 잎이 떨어지니 가을빛은 흩어지고(葉落秋光散)/ 골짜기에 눈 쌓이니 새소리 끊어진다.(雪谷鳥聲斷) -천고담(天高談)에서

자연의 순리대로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를 어찌 인간이 함부로 거역할 수 있겠는가. 배고프면 밥 먹고, 고단하면 잠자고, 눈앞에 있는 경치를 시로 노래하며 사는 평범한 삶에서, 우리의 삶은 참 맛이 있는 것이다. 무변광대한 우주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티끌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야 말로 오죽할까.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이런 진리를 깨닫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일체의 헛된 욕심에서 벗어나 맑고 밝은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입춘(立春)날 아침. 입춘첩(立春帖)을 붙이면서 문득 겨울과 봄 사이를 이어주는 이월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이월은 겨우내 꿈꾸었던 대지의 함성을 온누리에 터뜨릴 기다림의 달이다. 그래서 이월은 설렘의 달이기도 하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힘들고, 고통스런 시기를 겪으면서, 희망의 봄을 기다리던 우리 민족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을까? 우리나라에는 이월을 아름답게 노래한 시를 찾아볼 수가 없다.

매서운 눈바람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일제강점기도 지나고, 위정자들이 강제로 민중의 입을 틀어막던 독재군부도 가고, 이제는 이월을 노래할 시기도 되었건만 이월을 향하는 우리의 심장은 납덩이처럼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삼월의 꽃천지도 아름답지만 이월의 하늘과 들판도 아름답다. 삼월이 꽃이라면 이월은 흙이다. 삼월이 희망이라면 이월은 간절함이다.

흙속에 묻혀있는 온갖 생물들에게는, 이월은 시련을 극복하고 시작의 기다림으로 설레는 절실함의 달이다. 겨울에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신비, 저 땅속 깊은 곳에서도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기쁨은 이월만이 지니고 있는 고결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누가 이월을 마냥 고통이라 생각하는가. 이월은 그리움으로 점철된 간절함의 계절이다. 이월이 지나면 곧 꽃피는 삼월이 되리라. 이월이 잉태한 간절한 함성의 노래가 곧 삼천리금수강산을 화려하게 수놓을 것이다. 삼월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이월은 더욱 빛나는 희생의 계절이 될 것이다.

구질구질했던 지난날의 누더기들을 이제는 훌훌 벗어 던지고 새 희망을 노래하자. 시인들이여, 완전한 봄이 오기 전에 먼저 이월을 노래하라. 고단한 인생의 삶 굽이굽이에서 절창이 태어나듯이, 오늘은 오감(五感)을 일깨우는 아름다운 시, 이월의 절실함을 노래한 절창의 시 한 수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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