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의 1번지, 안동의 서원…유암서원(流巖書院)

안동시에서 도산서원 방면으로 안막재를 넘어 중앙선 철도 밑 국도를 지나서 좌측 편 명잣 방면 군도를 따라 가다 이하역 앞길로 이상리 마을 뒤편 저수지 위 고개를 넘는다. 안동시청에서 10km지점 두루 마을 옆 산 밑 북향에 위치하며 진성이씨 경류정 종택 건너편에 유암서원(流巖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주변에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들판 너머로 수많은 골짜기와 냇물이 흘러 경관이 수려하다.

◇연혁
경북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537-1번지에 있는 서원이다. 1761년(영조 37년) 주하동(周下洞)입구인 북후면 도진리와 와룡면 주하리 경계인 ‘유암(流巖)’ 위에 사림의 공의로 낙금헌(樂琴軒) 이정백(李庭栢)을 제향하기 위해 서원을 세웠다.
1876년(정조 10년) 주촌(周村)의 합계(合溪) 가로 이건했다가 이듬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46년 사림들의 공의로 복설되어 매년 3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유암서원은 처음에는 유암서당으로 출발하였다. 1556년(명종 11년)에 마창 남쪽 산기슭에 처음 창건되었는데, 이황이 이곳에 와서 강학을 하였다. 그 뒤 유암 위로 이건하여 송계(松溪) 이형남(李亨男)·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낙금헌(樂琴軒) 이정백(李庭栢)을 나란히 배향하였다. 그 뒤 1786년(정조 10년)에 주촌으로 이건한 후 사림의 공의로 유암이사(流巖里社)가 되었다.
1868년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이형남과 이정회를 북후 물한에 소재하는 작산사(鵲山祠)로 옮겨 봉안하고, 이정백의 위패는 매판(埋板)한 뒤 사당과 동서재는 모두 헐리게 되고 강당이 남아 강습장소로 사용되었다. 1936년에 이수걸(李秀杰)이 발의하여 사림과 후손들의 수연금(收捐金)으로 토지와 전답을 매입하고, 동서재 2칸과 존덕사(尊德祠)·전사청(典祀廳) 등을 신축하여 유암서원으로 승격시켰으며, 이정백을 제향하고 있다.

◇구조
서원의 구성은 강당, 사당, 고직사로 되어 있는데 사당영역은 강당에서 계단으로 오르막을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어 아래서는 시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고직사는 강당 우측의 공터에 앉혀져 있다. 3개의 건물들이 각각 다른 향과 떨어진 거리를 가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조화된 처음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건물의 양식과 재료들 또한 건축적으로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강당
강당은 시멘트 조립식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우측 모서리 부분에 대문이 나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앞의 칸들은 모두 마루를 깔았고, 뒤의 칸은 2칸방, 마루, 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둥 전열 중앙의 3개만 두리기둥으로 하였으며, 전면에 ‘유암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사당
존덕사(尊德祠)라는 현판을 단 사당은 강당의 우측으로 계단을 올라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집으로 측면에는 풍혈판을 달았다. 전열의 기둥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시멘트 조립식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내삼문은 3칸으로 평대문형식이며, 지붕에는 시멘트기와가 올려져 있다.

◇고직사
강당의 담장 밖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ㅡ’ 자 집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에 슬레이트를 얹었다. 평면의 구성은 좌측으로부터 ‘방-마루-방-부엌’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의 앞에도 판문을 단 것으로 보아 광의 역할로 많이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엌대문의 위쪽은 환기와 채광을 위해 살창을 만들었다.

□배향인물

·이정백(李庭栢, 1553-1600)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유생이자 의병장으로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여직(汝直), 호는 낙금헌(樂琴軒)이다. 할아버지는 이연(李演), 아버지는 이희안(李希顔),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김예범(金禮範)의 딸이다. 양부 이희옹(李希雍)에게 입양되었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는 내외종(內外從)이었다. 형이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이다.

이정백은 경상도 안동부 주촌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에서 태어났다.
5세 때 퇴계 선생께서 선생을 보시고 기애하시며 세상에 유위할 인물이 된다 하시며 글씨를 쓰라 하니 선생께서 ‘충효’ 2자를 써서 올렸다. 이에 퇴계 선생께서 크게 칭찬하시며 학문을 면려하였다. 선생은 11세 때 친상을 당하여 백형인 송간 이정회 선생과 같이 3년간 시묘했으며, 학봉 김성일, 비지 남치리(南致利), 송소(松巢) 권우(權宇) 선생 등과 교유하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을 토론하고 연구하는 한편, 이황의 『이학통록(理學通錄)』을 정서하는 등 가학을 계승하였다.

1588년(선조 2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동지들을 모아 창의하는 한편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렸다. 향인들에 의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배용길(裵龍吉)이 부대장이 되었다.1592년 8월 예천 용궁에 도착하여 의병대장의 직책을 김해(金垓)에게 넘겼다. 이후 배용길과 함께 의병장의 막하에서 좌·우부장이 되어 병사와 군량을 모으는 일을 돕고 병기와 군기를 맡았다. 안동, 예천, 상주, 의성, 군위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 밀양으로 이진하고 응천, 경주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던 중 2년간의 전란으로 인하여 병을 얻고 가마에 실려 돌아왔다.

이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전란에 임하여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고 관직을 받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강학을 위해 집 남쪽에 소제(小齊)를 지어 낙금헌(樂琴軒)이라 편액(扁額)하고 자호(自號)로 삼으며 거문고를 벗 삼아 안분양병했다.

서원 건너편 경류정 종택(경북 민속자료 72호) 앞에 세종조 때 영변판관을 지낸 이정(李禎)(선산도호부사, 중이조참판)이 평안도 약산에서 옮겨 심은 600년 된 뚝향나무(천연기념물 314호)가 있다. 묘소는 안동의 북쪽 이계(伊溪, 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가후동(家後洞)에 있다.

□생애 및 일화

그는 천성이 꿋꿋하고 어질고 효성스러웠다. 5~6세 때 이미 어른스러운 태도를 지녔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옛 현인들의 자기 수양의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특히 집안의 어른인 퇴계 선생의 학문을 궁구하는데 열심히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는 항상 “우리들의 마음가짐과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마땅히 고인(古人)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고, 평상 시에도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가묘를 배알하고 부친께 새벽 문안을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한 방에 거처하며 책을 읽으면서 편안히 심신을 가누었다. 화급한 일을 당해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고, 편안히 쉴 때도 태만한 얼굴을 한 일이 없었다.

친척과 마을 사람에게도 늘 지성으로 대하였다. 누이동생 한 명이 집은 가난하고 자식은 많았는데, 모든 일을 두루 보살펴 주었다. 또한 가까운 벗인 권우가 일찍 돌아갔을 때, 권우의 자식이 아직 어리고 약했는데 사나운 종들이 화란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는 본종가(本宗家)에 의논해서 난동을 일으키려 한 괴수의 죄를 다스리니, 그 집이 이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었고 향리의 상하가 모두 존경하며 감복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왜란에 서울을 지키지 못해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을 하니, 그는 비분강개하여 적과 같이 살 수는 없다고 맹세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격문을 여러 읍에 보내니 향응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공을 추대하여 의병대장을 삼고,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 1556~1609) 공을 부장으로 삼았다.

8월에 행군하여 용궁에 이르러 여러 군이 진을 합하게 되었다. 그는 대장의 직위를 예안 의병장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에게 양보하고, 배용길과 더불어 부장이 되어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대오를 단결시켰다. 겨울에 예천으로 진을 옮겨 적과 대치하였는데 올가미를 설치해서 왜적의 우두머리를 포박하여 순영에 바쳤다. 1593년 봄에 남하하는 적을 추격해서 밀양현에 진을 쳤고, 5월에 응천으로 진을 옮겼다. 이때 명나라 군사가 서울을 회복하였고 적은 패주하였다.

그는 승세를 타서 추격하여 수십 급의 머리를 베었다. 그는 군진(軍陣)에 임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오늘 간악한 오랑캐를 섬멸할 것을 기약하나 군사의 힘이 매우 약해 그 이기고 지는 결과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하려는 생각이 있을 뿐이다.”고 했다.

그때에 학봉 김성일이 초유사로 있었다. 그는 대장 김해와 연명으로 편지를 올렸다. “충성과 의리의 마음은 본래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천지에 맹세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을 펴려고 합니다.”그때 경주에 있는 군사들이 간장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는데, 삼일장(三日醬)을 만들어서 이들을 구제하였다. 6월에 대장 김해가 경주 숙소에서 죽었다. 그는 친히 염습하여 본가로 돌려보냈다. 공이 의병을 일으킨 뒤 2년여 동안 전란 속에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동안 하루도 마음 놓고 쉴 틈이 없었다. 이로 인해 병이 깊이 들었다.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가마에 실려 돌아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출병한 지 몇 해 동안 임금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어버이는 늙으셔서 집에 계시는데 아들 직분을 오래 비워 두었으며 또한 병을 앓아 공사 간 두 가지를 모두 망쳤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9월에 서애 유성룡이 그의 공적을 조정에 천거하여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그는 부임하지 않고 “전란에 임해서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고 또 관직을 받음은 신하로서 부끄러운 바이다. 그러니 내가 죽은 후에도 직명은 쓰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집 남쪽에 작은 집을 지어 낙금헌(樂琴軒)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그 가운데서 고요히 앉아 자연을 즐기면서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타면서 지냈다.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 1562~1624), 성헌(惺軒) 백견룡(白見龍, 1556~1622) 등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시고 간혹 시를 지어 서로 화창하였다. 1600년 향년 48세로 타계했다.

그는 집안에서는 효제의 행동이 있고 마을에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도리가 있어 그러한 마음으로 친족이나 친구를 잘 도와주었다. 나아가 국가에 대해서는 충성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절개를 보였다.

그와 같이 의병 활동을 했던 금역당 배용길은 “공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나와 일을 함께 하였는데 공은 엄격하고 꿋꿋한 자질과 충성스럽고 어진 성품으로 의병을 잘 이끌어 통솔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기로 맹세하였다. 일을 조처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늘 시의적절하여 몇 해 사이에 수많은 적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김해 공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공도 또한 병으로 병사를 이끌지 못하게 되어 큰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반면 부모 곁으로 돌아가 능히 봉양의 도를 다하여 효도로써 칭송을 받았으니 공은 충과 효를 모두 갖춘 사람이라 할 만하다.”고 평가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창의록(倡義錄)』, 『진중일기(陣中日記)』 등이 있으나 병란 중에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시문 약간만 전한다. 그의 시는 담담하고 소탈한 맛과 불의에 비분강개(激仰慷慨)한 기운이 넘친다고 평가되었다.

그는 양자로 들어갔는데 자신도 아들이 없어 사촌 이광복의 셋째 아들을 입양하여 뒤를 이었다. 그런데 그도 아들이 없어 생가 형의 셋째 아들 이조형으로 후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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